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1> 러시아 초대전②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1> 러시아 초대전②

입력
2003.09.01 00:00
0 0

1991년 에르미타쥬 미술관과 계약을 맺고 모스크바로 돌아오니 푸슈킨 미술관에서도 전시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에르미타쥬 미술관보다 한 달쯤 앞서서 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연말이 다 되도록 정식 계약서가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전화를 해보았더니 미술관측은 내 작품을 보고 난 후에 최종 결정을 하겠다며 한국의 모 재단 초청으로 93년 초에 방한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미술관 인사들이 이 재단의 초청으로 오게 되면 내 전시는 물 건너 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재단은 자신들이 추천하는 조각가 전시회를 푸슈킨 미술관에서 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방한한 푸슈킨 미술관 관계자들은 내 화실에 들러 작품을 보며 큰 관심을 표했고 큐레이터가 내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자고 얘기하는 듯했다. 전시회 계약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졌다.그리고 4개월 뒤인 4월28일 푸슈킨 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시작됐다. 그 때 마침 안토노바 관장은 파리에 출장을 가서 참석하지 못했지만 러시아 문화성의 예브게니 시도로프 장관이 나와 축사를 했다. 그는 축사에서 나를 세계 정상급 작가라고 찬사를 보냈고, 모스크바의 모든 신문들은 '전통적으로 유럽 예술만을 전시하던 푸슈킨 미술관에서 동양 미술을 선보이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5월30일 푸슈킨 미술관에서 전시가 끝나고 당초 6월15일부터 에르미타쥬 미술관 전시회가 잡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작품을 운송하기 위해 준비하는 상황에서 관장이 바뀌면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계약 당시 부관장이던 베오드르스키가 신임 관장으로 승진했는데 그는 전임 관장이 계약한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명한 미술관이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몹시 실망했다. 나와 수는 러시아 초대전 포스터를 들고 관장을 만났다. 이번에는 포스터를 보고 "후원사인 모 항공사 로고가 미술관 이름보다 크게 나갈 수 있느냐", "우리 미술관 이름이 푸슈킨 미술관보다 아래에 있느냐"는 등의 트집을 잡았다. 나는 그들이 지적한 모든 것을 고치고, 전시를 예정보다 늦춰 7월10일부터 하기로 합의했다.

전시가 연기되면서 작품을 창고에 임시로 보관하고 일시 귀국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피로가 몰려와 수와 나는 앓아 누웠다. 며칠 후 에르미타쥬 미술관은 전시 계약서 작성을 위해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수는 자신도 끙끙 앓고 있으면서도 젊은 자기가 가겠다고 일어섰다. 이렇게 어렵게 일이 성사된 만큼 보람도 그만큼 컸다. 전시회에는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 미술관장, 그리고 각국 대사들이 참석하였다. 미술관은 전시가 끝난 후 전시작 중 '승무도'를 소장하겠다고 제의했다. 이 작품은 93년 이래 오늘날까지 10년 동안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칸딘스키 작품과 나란히 걸려 있다.

이 전시회를 하면서 한국 문예진흥원에서 1억원이라는 큰 돈을 지원 받았다. 그런데 이 돈을 받을 때도 한 관계자는 다른 화가들의 반발을 걱정했다. 회의를 열고 보니 걱정한 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심의회는 "누구든 외국의 권위 있는 미술관에서 초청장을 받아오면 지원해 주겠다"고 지원 방침을 무사히 통과시켰다.

그런데도 어찌 된 일인지 국내에서는 기대와 달리 나의 러시아 전시회가 묵살당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상한 소문까지 떠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전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뇌물을 써서 그런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돈을 써서 러시아 국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또 작품을 영구 소장하게 하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러시아 미술협회 부이사장은 "이번 김수의 전시회는 세계에서 몇 명밖에 남아있지 않은 최고의 화가, 또 그 중에서도 몇 명만이 이룩할 수 있는 큰 일"이라고 개막식 만찬회에서 극찬을 했는데 말이다.

나는 프랑스 뤽상부르 미술관과 러시아 초대전의 공로를 인정 받아 99년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상은 97년 미술의 해 조직위원장이던 서양화가 이대원씨가 한·불 수교 100주년 기념전 공로로 받은 이후 생존 작가로는 세 번째이다. 나는 상에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 그 동안 화단에서 천대를 받았던 하모니즘이 국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