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 대가(大家)의 질부 며느리들이 밤 마실을 나다니기 시작한 게 어림잡아 십 수년 전부터다. 상투야 풀었지만 여전히 추로지향(鄒魯之鄕)을 자부해 온 고을. 문규(門規)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하물며 '쟁이들이나 하는 천한 일'로 알던 장사를, 그것도 가문 대소사에 정성으로 올리던 물건으로 전을 편대서야…. 해서, 마을의 여자들은 사랑채 어른들의 혀차는 소리에 마음 졸여가며 일을 감행했던 것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월은 미편해하는 문장(門長)의 큰 기침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나. 태백 소백, 양백(兩白)의 준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앉은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오지마을 닭실의 전통 한과는 그렇게 어렵사리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닭실 규방 사람들의 한과 자랑
추석을 앞둔 26일 오후 닭실마을 들머리 부녀회관은 시골 방앗간처럼 부산했다. 젊은 축에 드는 50,60대 아낙 예닐곱이 잔유과(손가락 굵기의 강정) 재료로 쓰일 찰떡 살을 자르는 동안, 곁방에서는 옮겨온 떡살을 구들에 펴 말리느라 바빴다.
부녀회 임원진들은 전화가 놓인 안방에 포진해 있었다. 쌀가루 튀밥가루로 뿌연 방바닥 한 켠에 총무 손숙(孫淑·59)씨가 손님자리 대접으로 신문지 한 장을 펴는 동안에도 회장 이임형(李姙衡·72)씨의 손놀림은 조물조물 쉴 틈이 없다. 이씨가 맡은 일은 포장 전단계인 꽃 입히기. 흰깨 검은깨로 단장한 입과(손바닥 만한 유과) 위에 조청을 발라 꽃받침 삼고, 그 위에 눈꽃 같은 찹쌀 튀밥과 건포도를 잘게 쪼개 꽃 모양을 얹는 공정이다. 기계로 찍어내는 온갖 요사한 식화(食花)와는 다른, 그 무던하고 우직한 정성에 '희한하다'고 운을 떼자 "500년도 더 된 일인데 희한할 건 또 뭐니껴"라고 반문. "먹어 본 사람들이 모두 옛날 우리 맛이라 캐요. 우리는 그 맛에 또 밤잠 안자고 일을 하고…." 왁자지껄 아낙들의 닭실한과 자랑이 추어 오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던가. "맛이나 함 보소"하며 총무 손씨가 덜어낸 유과에 선뜻 손을 들이밀기가 무안했다.
조상 음덕 기리던 음식
닭실마을은 조선조 권문(權門)의 하나에 드는 안동 권씨 일가가 세거(世居)해 온 집성촌. 소백산맥 자락인 백설령에 기대 앉아, 날개처럼 펼쳐진 능선을 좌우로 마주한 마을 형상을 두고 옛 풍수들이 금계포란(金鷄抱卵)형 길지로 꼽았다는 곳이다.
거기에 아직 100여 세대의 권씨 대소가들이 먼 조상 가운데 우뚝한 '충재(沖齋) 권벌 할배'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모여 산다. 조선 중종조 의정부 우찬성을 지낸 권벌(1478∼1548)은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참여했던 사림파로 기묘·을사 양대 사화때 파직·희생된 유학. 훗날 선조는 그를 영의정에 추존하고 불천위(不遷位)의 반열에 올린다. 불천위란 통상 4대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유교 관례에서 벗어나 후손으로 하여금 영원히 제사를 받들도록 나라에서 허락하는 것으로, 불천위를 가졌다는 것 하나가 가문의 영광이 되던 시절이었다. 18대 종손 권종목(權宗睦·61)씨는 "종가 여인들이 모여 어른의 제사에 쓰일 유과를 만들던 게 내림음식으로 지금의 닭실한과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재료 준비서부터 손놀림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정성을 담는 것이겠다.
고집이 더해져 전통이 되고
한과는 제사 음식 가운데에서도 가장 손이 많이 가고, 관혼례 등 대소사에서는 가문의 품격을 가늠케 하는 잣대이기도 했다.
물론 일촌일품(一村一品) 바람을 타고 600g 한 근에 1만원 짜리 상품으로 나오는 지금의 닭실한과(유과 강정 약과)가 젯상에 오르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쌀알 하나하나 미끈한 놈들만 골라 빻다가는 될 일이 없겠기 때문이다. 강정만 하더라도 자하초 달인 물로 꽃분홍 연분홍 두 색을 내고, 치자에서 노란 색을 얻고, 검은깨 흰 깨로 두 색을 더해 만들던 오색 강정은 아니다.
그래도 종부 손숙(59)씨는 "바빠서 지금은 두어 색만 내지만 그 외 공정에 드는 정성은 제수와 다르지 않다"고 우겼다. 500년 노하우에 일가 부녀회원 22명의 손 노동만으로 만드는 것이니 손씨의 말도 근거있는 항변인 셈. 그런 덕에 닭실한과의 명성이 알려져 몇몇 유명 백화점에서 명절 독점계약 의뢰도 있었지만 우선은 물건을 댈 수가 없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제는 선생보다 닭실한과가 더 유명하게 됐다"며 농담을 건네자 "조상이 있고 내가 있지, 그런 말 하모 안되니더"라며 정색을 했다. 그런 고집이 있어 닭실한과는 전통 한과가 아니라 '한과의 전통'인지 모른다.
주문이 밀리는 요즘 같은 대목에는 일이 새벽 1, 2시까지도 이어진다. 부녀회는 재료비와 인건비를 나누고 남는 돈은 모두 부녀회기금으로 적립한다.
가문의 맛도 전하고 조상의 덕도 알리자는 게 닭실한과 사업의 대외적인 명분이라면, 바깥사람 눈치 안보고 함께 모여 원 없이 정 나누고, 가욋돈도 얻자는 목적도 있을 터. 하지만 13년 전 가격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으니 회계를 따지자면 남는 것도 많지 않다고 했다. 닭실한과는 전화나 인터넷으로 주문할 게 아니라, 직접 가서 마을의 옛 집들과 고집스런 사람들을 만나본 뒤에야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과자다.
/봉화=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古家·돌담 복원사업 한창 "전통마을로 명성" 기대
닭실마을은 최근 봉화군의 민속마을보존지구에 들어 고가와 돌담 복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영남지방 반가의 전형인 '?'자형 구조로 지어진 종택은 아담하지만 위엄이 있고, 길을 따라 종택을 옹위하듯 늘어선 고택들도 인상적이다. 종택 뜰 한 켠에는 연못을 파고 널찍한 거북바위 위에 지은 정자(청암정)가 있고, 유물관도 들어서 보물로 지정된 권벌의 책과 문서 서첩과 서화 등을 전시하고 있다. 조만간 콘크리트 슬라브로 된 부녀회관도 헐고 그 자리에 주차장을 건설하는 대신, 회관은 기와한옥으로 다시 지을 참이라고 했다. 인근에 소수서원이 있고, 부석사가 있어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있지만 정비가 끝나고 나면 제법 전통마을로도 명성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대체적인 기대. 하지만 노종손을 모시고 종택을 지키는 18대 종손 권종목씨는 "세상이 하수상해 TV에서조차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고, 이제는 '호적제'까지 시비를 거는 세태이니 대문을 활짝 열어서 어떻게 될지…."라며 말 꼬리를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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