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累卵)으로 치닫던 한반도 위기는 베이징 6자회담을 통해 힘들고도 희망어린 가도로 들어섰다. 6자회담은 한반도문제 해결방식으로 국제적 다자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남북 당사자는 물론, 미일중러 등 4강이 전후 처음으로 모두 참여하는, 한국문제 해결의 '탈(脫)한국화'·국제화 실험을 의미한다.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기본틀인 양자주의·쌍무관계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궁극적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따라서 6자회담은 우리에겐 기회와 위기의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동아시아 안보와 경제협력에서 다자주의를 거부하던 미국이 북핵 문제의 국제화를 통한 대북 압박, 반테러동맹 강화, 중러 견제, 한미일 동맹 유지, 경제부담의 분담이라는 다층목적을 위해 다자주의를 도입한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하나의 전환점일 수 있다. 즉 북핵 해결을 위해 일시 시도되는 다자주의를 발본적 인식전환을 통해 한국문제의 해결을 위해 지혜롭게 안착시켜야 한다. 우리가 중화체제, 일본 제국주의, 미소 냉전체제의 시기 동안 중국, 일본, 미소에 대한 일변주의(一邊主義)를 통해 각각 속방국가, 식민국가, 분단체제를 경험해왔음을 유념할 때 열강의 요충인 이곳에서 통일과 평화를 위한 국제균형과 조화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러시아는 탈냉전 이후 처음 한반도문제의 주요 행위자로 직접 참여하였다. 러시아는 사할린 천연가스 프로젝트를 통해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면 에너지 수출을 통한 막대한 이익 확보, 동아시아 에너지-안보공동체 참여, 그리고 '미일중 견제'라는 일거삼득의 효과를 얻는다. WTO 가입에 따른 경제구조 개편, 서부 대개발계획, 올림픽 개최 등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중국은 북핵 문제가 미국의 MD추진과 일본의 핵무장화라는 '거대위협'을 유발하여 중국 포위와 안보불안을 초래, 21세기 국가방향을 틀어놓고 역내안정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전범 일본'은 전후 최초로 동아시아 평화와 한반도문제 해결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참여동기를 넘어 한반도 평화화·비핵화는 동아시아평화의 최대 파괴자였던 일본의 영구비핵화·평화화와 직결되어야 한다. 나아가 남북·일의 비핵화는 3대 핵강국인 미중러의 동아시아에서의 핵 불사용을 확약받아 이곳의 핵전쟁 위협을 제거하는 동아시아 평화비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다자화와 탈한국화가 갖고 올 원심력을 소화할 사회통합과 민족 내부협력은 너무 중요하다. 특히 전환기 민족문제에 관한 한 사회통합은 국가발전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국가리더십의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의 이념적 양극화와 남북 군사대결을 방치하면서 다자화와 탈한국화의 길을 앞서간다면 그것은 내부역량 부족으로 열강쟁패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던 19세기 말의 비극을 반복할지 모른다.
만약 다자주의 실험에서조차 동아시아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의 단초를 놓지 못한다면 위기는 재연될 것이다. 양자주의는 복원되고, 북한의 핵위협과 북미 양자대결은 우리를 전쟁위기로 다시 몰아넣을 것이다. 다자주의는 쌍무관계에 비해 평화가 가져다줄 평화이익이 갈등이익을 훨씬 넘는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구축을 위한 이 역설적 기회를, 대화의 동력 유지와 상황악화의 방지라는 최소한계를 유지하는 가운데에 동아시아 평화질서로 전환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한다. 북핵 위기 해소와 함께 우리는 평화협정 체결, 군비축소, 북한의 정치·사회 개혁 등을 향한 평화와 개혁과 상생의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 다자회담을 통해 북핵 해소를 위한 동아시아 에너지공동체, 또는 대북 경제협력 콘소시움이 건설된다면 오늘의 위기는 북한의 열림과 함께 동아시아 경제·평화공동체 건설로 도약하는 안티클라이막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 명 림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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