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30일 법학자 유진오가 81세로 작고했다. 유진오의 호는 현민(玄民)이다. 서울 출생. 현민의 짧지 않은 삶은 온갖 영예로 화려하다. 경기고 전신인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다니는 동안 그는 자신의 가장 뛰어난 학우들마저 평범하게 보이게 할 만큼 두드러졌다. 모교의 강사로 시작한 그의 교직 생활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해방 뒤에는 그 학교의 후신인 고려대의 총장으로까지 이어졌다. 1920년대 후반∼30년대 전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성기 때는 동반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현민은 또 당대 최고의 법학자로서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했고, 초대 법제처장을 지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정계에 들어가 신민당 총재로 활약하기도 했다.그런데도 16년 전 오늘 그가 타계했을 때 빈소에서는 큰 소란이 일어났다. 현민의 사회장 빈소가 차려진 고려대는 그가 교직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14년간이나 총장을 지낸 '실질적 모교'였지만,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현민을 '반민족·반민주 인사'로 규정하고 빈소 철거를 요구하며 시위와 연좌 농성을 벌였다. 사실 현민의 화려한 영예 속에는 지울 수 없는 불명예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1980년대 전두환 내란정권의 국정자문위원 자리를 받아들인 것이 그의 마지막 불명예였다면, 1940년대 전반기의 친일 문필 활동은 그의 불명예가 시작되는 지점에 놓여있을 것이다.
일문 잡지 '신세대(新世代)' 1944년 9월호에 실려있는 현민의 전쟁 선동 연설 한 대목. "일억대화(一億大和), 최후의 돌격을 향해 매진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필승의 신념은 결코 헛된 맹신이 아닙니다. 실로 이와 같은 필승의 이(理)를 자각하고 '대화일치(大和一致)', 서로 굳세게 최후의 단계를 돌파하고 나아가야겠습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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