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듯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입추가 바로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에 산책하러 나섰다. 가을 향기를 살짝 실은 산들바람에 한껏 깊은 숨을 들이쉬며 걸어가는데 양재천에 발을 담그고 독서삼매에 빠진 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가다 보니 이번에는 단소 소리가 나의 귀를 끌었다. 자매인 듯한 소녀 둘이 등을 대고 한 소녀는 단소를 불고 또 한 소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휴가여행을 떠나지 못한 사람의 마지막 피서였는지, 가을의 초입에서 여름의 소란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몸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아름다웠다.이렇게 계절이 바뀔 즈음, 아이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여름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집안의 전등을 모두 끄고 손전등을 태양 삼아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해 설명했다. 과학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에 치중했던 나와 달리 '바람이 멈출 때'의 엄마는 사색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대답한다.
구름 속으로 해가 가라앉으며 날이 저무는 것에 슬퍼진 아이가 왜 낮이 끝나야 하느냐고 묻자 그래야 밤이 올 수 있고 밤은 달과 별, 아이를 위한 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낮이 끝나면 해는 다른 곳에서 빛나기 시작하고 이곳에서 바람이 그치면 다른 곳으로 불어가 나무들을 춤추게 한단다. 산봉우리를 넘으면 밑으로 내려가 골짜기가 되고 파도가 모래에 부서지면 바다에 스며들어 새로운 파도를 만든단다. 이렇게 이 세상에 정말로 끝나는 것은 없으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새로 시작한다고 말한다. 마침내 "그렇지만 나뭇잎이 떨어지면 가을이 끝나잖아요" 라고 아이가 묻자 "그래, 그렇지만 가을이 끝나면 겨울이 시작되잖니?" 라고 말한다. 엄마의 대답은 매번 상상력이 넘치고,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는 자연현상을 아쉬워하는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족하다.
목판 위에 그린 노란색 톤의 그림은 가을 날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 같은 느낌을 주어 마음이 포근해지고 나무 한 그루에 가을과 겨울을 동시에 그려낸 작가의 아이디어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키우다 보면 유난히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많이 주고 집착하는 아이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아이들에게 자연의 유한성과 영속성을 동시에 느끼게 해줄 것 같다.
1962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은 그 후 세 번이나 글을 고쳐 썼고 그림도 새로 그렸다고 한다. 기차나 도로처럼 인공적인 것에 대한 질문은 빼고 자연과 환경에 대한 것을 보태 내용의 응집력을 높이고 그림도 매번 다른 화가가 그렸다. 10년 전, 아니 5년 전에 출판된 책을 찾는 것도 힘든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한 권의 책이 가진 긴 생명력과 끊임없이 그것을 보완해 새롭게 만들어 내는 그들이 부럽기만 하다.
/대구가톨릭대 도서관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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