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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길위의 이야기/짐 꾸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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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길위의 이야기/짐 꾸리기 1

입력
2003.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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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려면 이것저것 많이 챙기게 된다. 하지만 대체로 쓸 데 없는 것들이다. 내 경우엔 쌍안경을 꼭 집어넣는데 가져가서 그 무거운 망원경으로 뭘 본 적이 거의 없다. 좋은 풍경은 굳이 쌍안경으로 볼 필요가 없다. 맨눈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작은 동그라미 속에 가두어서 뭘 하겠는가. 꼭 러시아제, 그것도 구 소련제 쌍안경을 고집하는 분들이 내 주변에도 있는데 군사용 쌍안경은 그야말로 군사용일 뿐이다. 초소에 놓고 침투하는 적을 빨리 발견해 방아쇠를 당기는 게 목적이지 산천 유람에 지참하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는 말씀.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쌍안경만 보면 마음이 설렌다. 남자의 영혼은 여자요, 정신은 아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결국 쌍안경은 아내의 눈을 피해 가방에 들어가고 여행하는 내내 구박과 저주를 받는다.

'그래도 이왕 가져온 것이니 한 번은 써야지' 하고 쌍안경을 꺼내면 함께 간 일행이 모두들 한 마디씩 꺼낸다. "야, 쌍안경을 다 가져왔네!", "오...대단한데?" 그러나 그걸로 경치 한 번 보고 나면 끝이다. 아무도 더 이상 쌍안경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럴 때면 쌍안경에게 미안해서 콱 울고 싶어진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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