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50여 년 동안 남북 문화가 여러모로 달라졌지만 그 중 역사 연구는 특히 이질성이 두드러지는 부문이다. 남한의 역사학은 한동안 일제 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군사 정권의 이념 틀에 갇힌 탓에, 북한은 과도한 민족주의나 주체사상의 영향으로 사실(史實)을 보는 눈이 크게 달랐다. 역사 교양지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발행·편집인 강만길 상지대 총장)는 가을호에서 '북한 역사학이 본 우리 역사 속 전쟁'을 특집으로 다뤄 눈길을 끈다.고구려의 대 수·당 전쟁과 고려의 대몽 항쟁, 임진왜란, 신미양요에 대한 남북의 해석이 어떻게 다른가 살핀 글을 모았다.
이강래 전남대 교수는 북한 사학계에서 "고구려가 관련된 모든 전쟁은 예외 없이 이민족의 '맹목적 정복욕에 사로잡힌 무모한 침략 책동'과 이에 대한 고구려 인민의 '반침략 조국 방위를 위한 정의의 전쟁'으로 조명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봉건시대 영웅들이 당시의 계급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북한의 올바른 비판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사의 전개 과정에서 강조되는 '고토 회복'이나 '겨레 통합' 역시 그 시기 해당 사회 내부의 수준으로 돌아가 이해하는 것이 형평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사실에서도 북한은 을지문덕이 우중문의 300만 대군을 맞은 곳을 남한에서 알고 있는 평양 인근이 아니라 북평양인 봉황성이라고 주장한다고 소개했다. 이 경우 살수대첩의 위치도 청천강이 아니라 압록강 이북이 된다.
북한이 '임진조국전쟁'이라 부르는 임진왜란의 경우 1970년대 이후 북한의 연구 활동이 매우 미진하다고 조원래 순천대 교수는 설명했다. 특히 주체사관의 등장 이후 80년대 후반에 나타난 '조선민족 제일주의'의 영향은 역사학 전반에 걸쳐 학문적 과학성과 객관성을 상실케 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임진왜란 중 일어난 반정부 민중봉기를 설득력 없이 미화한 것 등이 그런 경우다. 남한이 이순신의 활동을 집중 부각한 데 비해 북한은 조선 수군의 전력과 전술 특징을 분석해 승리 요인을 규명하려 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외세의 침략성을 강조하고 인민대중의 투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개화기 이후 미국 관련 대목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미국 관련 주제는 인민의 반미투쟁을 강조하는 데 치우친 나머지 객관적 사실마저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고려의 대몽항쟁사 연구만큼은 북한의 역사 해석이 타당한 부분이 많고 남한보다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윤용혁 공주대 교수는 "북한은 고려 대몽항쟁사를 이미 60년대에 대부분 완성했다"고 밝혔다. 남한에서 이 시기에 대한 본격 연구서가 90년께 처음 나온 것과 대조된다. 또 항전에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고 그 주체를 농민, 노비 같은 피지배층으로 보는 것은 남한에서는 70년대 말 일부 진보 학자들이 강조하기 시작해 이제 거의 정설로 자리잡았다고 평가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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