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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보내는 편지/너무 큰 당신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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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보내는 편지/너무 큰 당신의 빈자리

입력
200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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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당신께.모처럼 당신을 불러 봅니다. 당신이 떠난 뒤 2개월이 내게는 마치 20년처럼 느껴지는군요.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오늘 아침에는 외아들 덕우가 6학년 답지 않게 "엄마가 보고 싶다"며 칭얼대더군요. "엄마는 덕우가 씩씩하게 학교에 가기를 바라고 있단다"라며 달랬지만, 마음속으로는 나 역시 펑펑 울었습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행복했습니다.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느라 당신은 덕우의 아침 등교를 직접 챙겨주지 못하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지만 남부러울 것 없었습니다. 덕우는 아침 7시면 당신이 녹음한 모닝콜을 들으며 잠에서 깨었지요. "덕우야, 용돈은 화장대 성경에 끼워져 있으니 성경 한 구절을 읽고 나서 꺼내가렴. 사랑하는 엄마가."

당신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늘 좋은 엄마이자 아내였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아들 이름을 딴 '윤덕우'라는 이름의 의류 가게를 운영했던 당신은 직접 디자인한 숙녀복을 만들어 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인들을 대상으로 판매했습니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퇴근하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았지요. 아침에 퇴근하는 당신과 식사를 하는 것이 내겐 큰 즐거움이었답니다.

마침 내가 비번인 그날도 우린 만나서 함께 집에 가기로 했지요. 그런데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오지 말라고 연락하고 싶어 당신에게 휴대폰을 건 시간이 오전 10시 10분. 알고 보니 불과 2∼3분전에 당신은 전과자 출신의 노숙자에게 등을 떠밀려 역 구내로 들어오던 전동차에 치여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평소 돈이 있는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당신을 이유없이 떠밀었다고 하더군요.

현장에 도착해 두 조각이 나있는 당신의 육신을 보았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처럼 오붓하게 맛있는 것 먹자"며 속삭이던 당신이었는데…. 착하고 성실하게 세상을 살아온 당신이 왜 그리 끔찍하게 유명을 달리해야 하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지하철 수사대의 일원으로서 나는 평소 지하철역 구내에 스크린 도어를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지 않은 현실에서는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크린 도어 설치비가 1개 역사 당 수십억원이 소요되기 때문에 해당 부처가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지만 이보다 시급하지 않은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의 설치비로 수천억원이 배정됐다고 하니 앞뒤가 뒤바뀐 느낌입니다. 또 당신의 죽음이 더욱 값 없이 느껴져 애통합니다. 당신은 이제 영 못 올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마지막 희생자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윤 병 소 서울지방경찰청 지하철수사대 형사반장

이 글을 보내 온 윤병소(47)씨의 부인 안상란(41)씨는 지난 6월 27일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 구내에서 전과자 출신의 노숙자에게 등을 떠밀려 지하철에 치여 숨졌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이유 없는 살인'이라는 사회적 충격을 던지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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