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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7> 신봉조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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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7> 신봉조 선생님

입력
200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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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아니 한다"내 결혼식 날 고린도 전서 13장을 읽어주며 축사를 해주신 분이 바로 신봉조 선생님이시다. 나를 아는 사람들 중에도 내 결혼에 대해 좋지 않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분은 나를 이해해주며 끝까지 우리의 결혼을 축복해주셨다. 이화여고 교장 선생님과 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이 학교를 명문학교로 키우고 50년 전 서울예고를 창립한 그 선생님은 내 인생에 있어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신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선린상고 미술교사로 있던 1947년이다. 당시 동화 백화점(현 신세계 백화점)에서 선린상고 학생들의 산업미술전을 열고 있을 때 전시장에 찾아와 점심을 사주며 격려해주셨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후 매번 고비 때마다 인생의 나침반이 돼 주셨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에 내가 미 10군단에서 종군화가 생활을 마치고 임시 수도인 부산에 들렀을 때였다. 나는 부산 영도에 이화여고가 가교사를 차리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아. 참 잘 왔다"고 하셨다. 당초 이화여고에는 우리 미술계의 대선배인 이인성씨가 교편을 잡고 있었으나 1950년 9·28 서울 수복을 앞두고 경찰관의 총에 맞아 돌아가신 후 미술교사가 없었다.

나는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은 후 3년 동안 재직하면서 신 선생님의 교육철학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철학의 기본이 된 것이다.

학기말 시험 기간 때의 일이다. 1학년 미술부 학생이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미술실에 들렀다가 종소리를 듣고 황급히 교실에 들어갔는데 시험감독 교사가 먼저 교실에 와 있었다. 헐레벌떡 교실에 도착한 그 학생은 시험지를 받아 들고 답안을 쓰기 시작했는데 감독교사는 그 학생 책상 서랍 속에 책이 들어있는 것을 적발했다. 교칙에는 시험기간 중 책상 서랍의 책은 모두 바닥에 내려놓도록 되어 있었다. 그 학생은 부정행위로 교무실에 끌려갔고 상당수의 교사들은 교칙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교직원 회의가 열렸다. 신 선생님은 이 자리에서 나에게 지도 교사로서 말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그 학생이 미술실에 함께 있다가 종소리를 듣고 뛰어 내려갔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면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학생이 부정행위를 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그 해 국전에도 입선했을 만큼 실력이 뛰어난 학생의 앞길을 학교가 가로막아서 되겠느냐고 했다. 신 선생님은 직원회의에 참석한 모든 선생들에게 "지도교사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처벌할 수 있습니까"라며 처벌 불가 결론을내렸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역시 2학년 미술부 학생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남학생들과 어울려 댄스파티를 했는데 이것이 학교에 알려졌다.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다른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당장 처벌해야 한다는 측과 우리 학교가 자유교육을 표방하고 있는 데 처벌할 수 없다는 측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신 선생님은 학생을 처벌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직원회의에서 그는 "이번 일은 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 일어난 문제라 학부모를 만나 자녀가 남학생과 댄스를 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부형은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부터 사교댄스를 추었다며 처벌을 원치 않았습니다. 학부모가 괜찮다고 하는데 학교에서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의 교육방침은 이처럼 자유롭고 앞서갔다. 50년 전에 벌써 예술고등학교를 세울 생각을 했던 것도 그러한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도 결혼식장에서 돋보기를 들고 성경말씀을 읽어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분은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분이 남긴 말씀과 가르침은 내 일생의 좌우명으로 떠나질 않는다. 선생님의 장례식날 나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있었고 입원한 나를 대신하여 수가 참석하여 조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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