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은 우리 현대사의 민주화 장정을 이야기할 때 전환점에 해당한다. 한국전쟁 이후 30여년 간 이어진 군사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을 탈피하려는 국민적 요구는 6·10 민주항쟁으로 터져 나왔고, 급기야 87년의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 어수선했던 80년대 후반 막 창간한 한겨레신문의 한 귀퉁이를 장식했던 시사만평 '한겨레 그림판'은 변화를 갈구한 젊은이들에게 환호성을 내지르게 했다.박재동(51) 화백.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일약 '스타 만화가'가 된 주인공이다. 그가 순식간에 세인의 눈길을 끈 이유는 그림체나 풍자 양식에서 당시까지의 일간신문 만평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띠었기 때문이다.
우선은 만평 그림체가 달랐다. 그의 만화는 사실적(寫實的)인 묘사를 기반으로 정확한 데생 실력을 구사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서울대 회화과) 고교 교사 경력까지 가진 '수준급'그림 실력이 만평에 그대로 담겼다. 박 화백의 사실적 만평은 연재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다소 과장된 그림체인 만화체(漫畵體) 그림으로 바뀌지만 탄탄한 스케치 실력만은 그대로 남았다.
또 하나의 차이는 만평의 내용이었다. 이전의 신문 만평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여론재판식' 비판이었다면, 박재동은 명확하게 자신의 풍자 표적을 설정하고 이를 집중 비판하는 진보성을 드러냈다. 그의 표적은 부도덕한 권력과 힘을 휘두르는 사람(집단), 반(反) 통일 세력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막 시작된 우리 사회의 민주노동조합운동에 그의 만평은 천군만마(千軍萬馬)의 힘이 됐고, 탈(脫) 이데올로기와 남북자주통일을 염원하던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진보성으로 말미암아 정부 당국의 은근한 통제가 가해졌고 한계레신문이 관공서 등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는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가 만평을 연재한 시기는 1988년 5월부터 96년 6월까지 약 8년간이다. 이 기간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척된 시기이기도 하다.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있을 때마다 교내 대자보에는 으레 그의 만평이 커다랗게 복사돼 내 걸리곤 했다.
박 화백의 개혁적 이미지는 8년 간의 교사시절(서울 휘문, 중경고)에서도 드러났다. 새로 부임한 학교에 텁수룩한 수염에 짧은 바지, 흰 고무신 차림으로 출근했다는 이야기, 미술 필기시험에 흰 백지에 두 개의 네모 칸을 그려놓고는 "종이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라" "학교건물 옆 가로등을 그리라"는 등의 문제를 냈다는 일화가 그렇다.
신문 연재를 그만두면서 그는 "시사만화는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할 수 있지만, 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누가 뭐라든 나는 '그림쟁이'이며 내 내면의 욕구, 진정한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에 가슴이 저릴 정도로 시달려 왔다. 더 늦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과감히 결단을 내린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 (주)오돌또기라는 애니메이션 회사를 꾸리면서 '우리식 만화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에 빠져 있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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