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8월25일 4년 여의 망명 끝에 샤를 드골이 파리로 돌아왔다. 프랑스의 수도가 나치 점령군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드골의 파리 도착 일성은 이랬다. "파리는 모욕 받았고, 파리는 파손됐지만, 마침내 파리는 해방됐다."해방의 희망이 싹튼 것은 그 해 6월6일 미군과 영국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였다. 그러나 독일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연합군의 진격은 파리 시민들의 기대만큼 빠르지 못했다. 프랑스인들은 국내 레지스탕스의 봉기로 독일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대혁명 155주년 기념일이었던 그 해 7월14일에는 일부 대담한 파리 시민들이 삼색기를 유리창에 내걸기도 했다. 연합군은 오를레앙을 거쳐 파리 남서쪽 샤르트르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파리 시청과 구청들 앞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독일 점령군과 전투를 시작했다. 마침내 8월23일, 르클레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 제2장갑사단이 포르트도를레앙을 통과해 파리로 들어왔다.
그 직전 베를린의 히틀러는 파리 전역에 불을 질러 그 도시의 모든 유적·유물과 주요 건물을 파괴하라고 독일군 파리 사령부에 명령했지만, 이 아름다운 도시에 반한 독일군 사령관은 명령을 어기고 항복하는 쪽을 택했다. 이 일화는 뒷날 르네 클레망 감독의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의 소재가 되었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는 영화 속에서 히틀러가 전화로 파리 점령군 사령관을 다그치는 대사이기도 하다. 독일 장군의 파리 애호 덕분에, 르클레르 장군이 파리로 진격했을 때 파리는 불타고 있지 않았다. 이틀 뒤 드골이 파리 땅을 밟았다. 프랑스의 해방은 압도적으로 미국의 공로다. 그러나 드골은 프랑스의 명예를 위해 파리 해방만은 프랑스군이 주도하기를 바랐고, 뜻을 이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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