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부스 지음·이은선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발행·1만5,000원한 사람의 열정과 상상력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 '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를 덮으면서 하게 되는 생각이다.
헤이온와이는 영국 서부 웨일스 지방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강변에 세워진 중세시대 고성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사는 주민 1,500명의 이 작은 마을에는 서점이 40개가 넘는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무너져가는 농촌에 지나지 않던 이곳이 세계 최초의 책마을로 변신해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을 맞는 명소가 된 것은 리처드 부스(65)라는 괴짜 덕분이다.
부스는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1962년 헤이온와이에 들어와 헌책방을 차린다. 책을 읽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없는 동네에 헌책방이라니, 다들 미친 놈이라고 혀를 찼다. 부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책을 사들인다. 재정난으로 문 닫게 된 웨일스 지역 대학도서관과 전통 있는 가문들의 서재를 뒤지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들랜드, 멀리 미국과 캐나다, 호주까지 찾아가 헌책을 구입해 세계에서 가장 큰 헌책방 주인이 된다.
부스와 거래하던 상인들이 하나둘 헌책방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헤이온와이는 수백만권의 책을 갖춘 책마을이 된다. 매년 5월이면 이곳에서 문학축제가 열리고 늦여름엔 재즈 페스티벌도 열린다.
이 책은 부스의 자서전이다. 부스는 대학시절까지의 성장기와 헤이온와이에서 신나게 좌충우돌하며 벌인 사업 이야기뿐만 아니라 헌책에 대한 지독한 사랑, 헌책 장사의 노하우, 어지러울 만큼 요란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여성편력까지 솔직하고 거침없이 쓰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반골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던 어린시절을 회고하면서 "우리는 힘없이 소리만 꽥꽥 질러대는 새끼돼지처럼 폭력과 협박에 의해 한 방향을 강요받았다. 학교는 속물근성의 온상이었다"고 쓴 것을 보면. 헤이온와이에서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술집에서 술주정뱅이 농부나 트럭 운전사들과 사귄 일이었다. 그와 함께 일한 동료나 직원도 알코올 중독자 목수, 성전환을 통해 아름다운 여자가 된 부인 등 별종이 많다.
그는 점잖은 헌책방 주인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어서 스스로 '정신병자' '변태'를 자임할 만큼 별난 기행도 많이 저질렀다. 그 중 압권은 1977년 4월1일 헤이온와이를 독립왕국으로 선포하고 '서적왕 리처드'로 등극한 일이다. 대관식은 시끄러운 난장판 파티로 진행됐다. 내각 명단은 술집에서 5분 만에 구성해 발표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진지한 발상이십니까?" 답은 이랬다. "물론 아니지요. 하지만 정치인들이 벌이는 수작보다는 진지하다고 보면 됩니다." 헤이온와이 왕국은 국가와 여권, 우표, 화폐까지 만들었다. 헤이온와이 문학축제가 시작된 첫 해, 자기 책을 홍보하는 데 혈안이 된 '촉새'들이 몰려오는 데 짜증이 난 그는 돈 되는 자리에만 모여드는 예술가들을 풍자하기 위해 '예술, 건달, 매춘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예술가는 다 건달이고 매춘부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때 그가 생각한 특별 이벤트는 토플리스 차림으로 전기톱질 하기였으니, 시끄러운 톱질 소리로 문학·예술가 양반들의 젠체하는 연설을 묻어버리자는 심술이었다.
부스의 이러한 행동은 중앙정부의 통제에 지방의 고유성이 죽어가고, 거대한 자본의 침투에 전통적 농촌문화가 쓰러지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는 관료주의를 미워하고 무분별한 개발에 반대, '웨일스 관광청을 폐쇄하라' '신이시여, 웨일스 지방개발청의 손아귀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라는 팸플릿을 쓰기도 했다.
온갖 소동과 마찰에도 불구하고 헤이온와이는 책마을로 유명해졌고, 부스의 영향으로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노르웨이 등에도 책마을이 생겨났다. 마침내 1998년 헤이온와이 독립선언 21주년 기념일에 부스는 '전세계 책마을의 황제'로 추대된다. 뇌종양으로 한쪽 귀가 멀고 말을 우물거리긴 하지만 그는 지금도 헌책을 팔며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잘 먹고 잘 마시며 잘 살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의 못 말리는 장난기나 유머 감각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인간적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의 모습은 더러 망나니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헌책방 제국의 황제로서 그의 철학은 더없이 진지하다.
"자본주의는 마흔 살에 백만장자와 수상, 두 가지 목표를 이루려는 젊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체제다. 책마을은 젊고 굶주린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고향을 걱정하고 이웃사랑이 남아있는 시골에서 자그마한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중년을 위한 공간이다. 나는 이들을 '황혼의 산업일꾼'이라 부른다. 이들은 획일적이고 정형화한 자본주의에 염증을 느낀다.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 헤이온와이를 다른 웨일스의 시골과 차별화한 것이다."
이런 기적을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게 되기를.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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