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 지음·서숙 옮김 민음사 발행·8,000원"런던에 온 첫 해,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나에게 런던은…일 년 동안은 악몽의 도시였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빛이 건물을, 나무를, 주홍색 버스들을 친숙하고 아름다운 무언가와 하나가 되게 만들었고, 나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도리스 레싱(84)은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영국인 작가다. 이란에서 태어났고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자란 그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고국에 왔다. 1년 뒤 장편 '풀잎은 노래한다'를 발표, 평단의 찬사를 받으면서 데뷔했다. 첫 작품을 포함해 많은 소설을 식민지 아프리카에서의 삶 체험에 빚졌던 레싱은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런던 풍경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런던 스케치'는 레싱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발표한 단편 18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그는 현대사회에서의 여성의 자아문제 혹은 남성과 여성, 여성과 여성 간의 미묘하고 파괴적인 감정의 상호작용을 다뤄온 작가다. 공간적 배경을 아프리카에서 런던으로 옮겼어도 작가의 주제 의식은 유효하다. 자동차가 다니는 거리, 사람으로 가득찬 지하철, 히드로 공항 같은 도회적인 장소에서 오가는 민감한 감정의 묘사가 탁월하다. 단편 '원칙'에서 좁은 도로에서 마주친 두 대의 자동차는 양보하지 않고 서 있고 뒤쪽에는 자동차들이 줄지어 있다. 단문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긴장감이 있으면서도 유머러스하다. '붉은 밴은 양보하지 않으려는 여성 운전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푸른색 에스코트는 비합리적인 남자의 억지에 직면하고 있었다. 차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내 앞에 있는 골프도 그들과 보조를 맞추려고 경적을 울렸다.' 임신한 채 가출한 소녀 줄리가 더러운 창고에서 혼자 아이를 낳고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좇는 '데비와 줄리'는 소녀의 눈높이에서 쓰여진 혼란스런 심리 묘사 자체만으로도 마음을 무겁게 한다. '캄캄했다. 마치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생각한다. 왜 책에는 물이 이렇게 쏟아진다고는 쓰여 있지 않았나?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니, 이건 아기구나.' '진실'은 이혼한 남녀가 제각기 둔 애인, 그 애인들의 전남편과 전처, 그들의 아이들 등 매우 복잡한 관계에서 오가는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의 첫 부분은 전화 대화에 기대서만 전개되는데, 연속적인 인용부호에서 포착되는 감정의 변화는 놀랍도록 세밀하며 신경질적인 대화에서 전달되는 일상의 이중성은 섬뜩하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데 소름이 끼친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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