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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85>마이클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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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85>마이클 콜린스

입력
2003.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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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8월22일 아일랜드자유국 정부 수반 마이클 콜린스가 밴던에서 암살당했다. 32세였다. 그를 살해한 사람들이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대원들이라는 것이 얄궂다. 바로 콜린스 자신이 IRA의 창설자였기 때문이다. 영국으로부터의 아일랜드 독립을 라이프워크로 삼은 콜린스는 정치 활동의 출발을 폭동과 테러로 시작했다. 그는 일주일간 더블린을 점령하며 500여명의 희생자를 낸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참가한 뒤 IRA를 조직해 테러와 도시 게릴라전을 실천했다.그러나 1921년 IRA가 영국군 합참의장 헨리 윌리엄을 살해한 뒤 피비린내 나는 보복전 끝에 이듬해 1월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아일랜드자유국이 탄생하면서, 콜린스와 IRA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자유국은 아일랜드섬 32개주 가운데 북부의 6개 주를 제외한 데다가, 완전한 독립국이 아닌 영국 자치령이었다. 콜린스는 아일랜드섬 전체를 아우르는 완전 독립국의 수립을 뒤로 미루는 '현실주의' 노선을 취했지만,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IRA 강경파는 콜린스를 배반자로 판단했다. 사실, 1937년 아일랜드가 독립을 선언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북아일랜드가 여전히 영국 영토로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콜린스의 현실주의 노선이 아일랜드 사람의 처지에서 반드시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IRA는 1990년대까지도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무장투쟁을 계속해왔다.

비타협적 테러리스트로 출발해 현실주의 정치인이 됐다는 점에서 콜린스는 야세르 아라파트를 닮았다. 일부 동족에게는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아라파트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우파에게는 여전히 파렴치한 테러리스트이듯, 동족에게 살해당한 콜린스도 영국 우파에게는 여전히 냉혈 테러리스트로 남아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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