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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5> 내 사랑 수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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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5> 내 사랑 수 ③

입력
2003.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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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가 3학년 때인 1985년 나는 낙원아파트의 집을 처분했다. 이 집은 위치는 좋았으나 낡고 협소하고 먼지도 많아 진작 옮기려 했지만 돈이 모자라 미루고 있었다. 마침 현대화랑 유화 개인전에서 팔린 그림 값을 더하고 부족한 돈은 그림으로 대신 주기로 하고 방배동 황실아파트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수와 함께 이것 저것 가구와 집기를 마련하면서 나는 내내 들떠 있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그렇게 꿈같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을까.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수의 집에까지 소문이 들렸나 보다. 수가 가끔씩 부모님과 전화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소곳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딸이 환갑이 훨씬 넘은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니 깜짝 놀란 것이다.

어느날 전화를 받은 수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잠깐 밖에 나가봐야겠다고 했다. 집 앞에서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올 것이 왔구나, 이대로 영영 끌려가는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잠시 후 수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자 수는 "선생님과 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그 운명을 막으면 저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수가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무리 운명이라 할지라도 인생 경험 없이 일인다역을 하며 정신적으로 20대부터 60대를 오르내리며 적응해야 하는 현실도 힘들었겠지만 가족이나 주변의 이해를 얻을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수의 혈압이 지나치게 내려갔다. 우울증에 빠진 수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 위스키 한잔을 마시고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나는 그녀를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병원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때 나는 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가 깨어난 후 마음을 굳게 먹고 태도를 바꾸어 쌀쌀 맞게 대해 보았다. 그래서 수가 떠나간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실 나를 이용해 화단에서 출세를 하려는 사람들, 특히 여성 화가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개인전을 연 후에는 나를 떠났다. 그런 생각으로 수를 대했더니 수가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저보다 좋은 여자가 있으면 말하세요. 언제든지 비켜드릴게요. 저는 선생님을 이용해서 출세하려는 게 아닙니다. 선생님의 작품이 확실하게 인정 받으면 떠날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참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끝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을 합쳐 이겨나가리라고 다짐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 우리 사이는 전보다 더 좋아졌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자 한동안 주변이 잠잠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부터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우리 형편도 많이 나아졌다. 집을 옮길 때만해도 교수직을 그만둔 상태라서 고정된 수입도 없고 600만원의 빚까지 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빚도 갚고 생활이 완전히 안정됐다. 그런데 하루는 수가 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선생님은 천재적 재능을 갖고 있으니 한국에서 썩지 말고 해외에 나가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 나이가 몇인데…"라고 했더니 그녀는 정색을 하며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두고 보세요. 제가 선생님을 꼭 그렇게 만들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수는 내 자료를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세계 화단에 내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전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6년 수가 83년의 미국 미술전문지 '월드 아트 트렌드'를 들고 뛰어왔다. "선생님과 비슷한 작품이 여기 있네요. 이름이 데이비드 살레라고 하는군요." I.M.F 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때 "앞으로 나와 비슷한 작품을 하는 작가들이 나올 수도 있으니 지금 내가 그 원조임을 밝혀야겠다"고 선언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런 기우가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그 후 수는 24시간을 내 전시를 위해 뛰었다. 전에는 집안에서 조용히 내조하는 데 그쳤으나 내 활동 영역을 넓혀주려고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1990년에 열린 프랑스 파리 뤽상부르 전시도 수의 적극적인 노력과 권유로 성사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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