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1월 서울 성균관대 명륜당 결혼식장. 예식 시간이 가까워오면서 손님을 맞는 신랑은 안절부절 못하며 연신 출입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식장에 들어가서도 주례사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였고 온 신경은 문쪽으로 뻗쳤다. 목을 빼고 기다리던 사람은 경북사대부고 배구부 3년생인 노진수.결혼식에 꼭 오기로 했던 노진수가 안 나타나고, 그를 놓고 스카우트 경쟁중인 대학최강 경기대의 박진환감독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도무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신랑인 김남성 성균관대감독(현 명지대감독)은 식이 끝나자마자 신부를 태운 차를 공항이 아니라 대구로 몰았다.
3시간여만에 경북사대부고에 도착. 교무실에서 노진수와 세터 신영철을 설득하던 박감독은 제주도로 갔어야 할 김감독이 들이닥치자 혼비백산, 결국 "김감독의 열정에 두 손 들었다. 노진수는 결혼선물로 양보하겠으니 마음 편히 여행을 다녀오라"며 다음날 간신히 등을 떠밀어 제주도로 보냈다.
김남성감독과 성균관대 배구의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2개월 후, 때마침 출범한 겨울시리즈 제1회 대통령배 슈퍼리그에 성균관대 유니폼을 입고 나온 노진수는 과연 김감독의 분석대로 동기 공격수중 최대어였다. 대학은 물론 실업 대선배들과의 대결에서도 전혀 위축됨이 없이 강약을 조절하는 매끈한 공격으로 신인상을 획득한 그는 곧 국가대표로 뽑혀 한국배구 부동의 에이스 강만수의 자리를 이어받고, LA올림픽에까지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
노진수는 공격시 상대를 보는 시야가 넓을 뿐 아니라 서브리시브 감각 및 유연성이 탁월했다. 파워와 지구력이 떨어지는 게 흠이었으나 김감독은 복근력 강화와 웨이트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키며 선배 이만근 홍기택에게 공격을 분담시키는 방법으로 노진수가 집중마크 받지 않도록 보호했다.
노진수의 성공에 뒤이어 마낙길 임도헌 신진식이 김감독 휘하에 들어가 한국배구 에이스의 계보를 잇는 거포로 성장했으며 이밖에도 장신세터 시대를 연 진창욱(193㎝) 방지섭(192㎝)과 센터 박종찬 김병선 권순찬, 왼손잡이 라이트 공격수 장병철 등 많은 제자들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는 노진수 마낙길 임도헌 박종찬 김병선 진창욱 등 6명이 대표로 나갔고 이후에도 노진수 마낙길을 제외한 4명이 한동안 베스트 6에 들어가 대표팀을 이끌었다. 성균관대는 슈퍼리그서 92 93 96년 4강, 95년 3위의 강호로 군림했으며 졸업생들은 90년대 중반까지 현대, 97년 이후 삼성의 무적시대를 리드했다.
96년 슈퍼스타 신진식의 진로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학교측에 의해 강제 퇴진 당했던 김감독은 여자 실업팀 현대를 거쳐 이제는 명지대에서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15년간 몸담았던 모교를 떠날 때의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진식을 두고 "고교에서 스카우트할 때부터 비용을 대 준 현대로 보내는 게 당연한 도리"라는 것이 김감독의 일관된 주장이었고, 학교측은 신생팀 삼성행을 종용하다가 김감독이 고집을 꺾지 않자 대기발령 낸 뒤 뜻을 관철시켰다.
선수도, 예산지원도 절대 부족한 모교팀을 맡은 후 홍기택 김상보등의 스카우트부터 시작해 거의 혼자의 힘으로 최고명문을 일구어 냈던 그는 배신감만 안고 이탈리아 프로팀의 코치로 떠났었다. 많은 팬들이 응원을 보냈지만 삼성의 성균관대 재단 인수와 맞물려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타고난 승부사 기질과 불 같은 성격으로 코트 안팎에서 많은 일화를 만들었던 김남성감독은 지난해 초 명지대 사령탑에 부임한 후 '독사'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전에 없이 평온한 인상을 풍긴다.
50대라는 나이도 있지만 떨어질 데가 없고 앞으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배구를 시작한 선수가 4명이죠. 부족한 기초를 다지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이제 완성단계입니다. 올 겨울 슈퍼리그에서는 뭔가 보여줘야 할텐데."
지난해 대학1차연맹전서 우승팀 한양대를 예선에서 잡은 후 4강서 경기대를 2-3까지 물고 늘어진 바 있고, 금년에도 경기대와 성균관대에 2-3까지 접전을 벌이는 등 눈에 띄는 향상을 보여 그의 기대는 만만히 꺾일 것 같지 않다.
202㎝의 장신 하경민이 명지대 감독 취임 1년반만에 처음 만든 국가대표이다. 현재 77㎏밖에 안 되는 체중을 10㎏만 늘리면 훌륭한 선수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안태영은 점프력이 좋아 마낙길을 모델로 키우고 싶은 선수. 197㎝의 최성범은 파워와 신장이 좋으나 기술이 미흡해 힘의 80%만 사용하는 공격을 가르치고 있다.
전북 익산에서 초등학교 5,6년때 축구와 배구를 한 그는 일화의 차경복감독과 70∼80년대 명지대 돌풍의 주인공 유판순 감독을 배출한 축구명문 이리동중이 GK로 뽑으려 할 정도로 운동소질이 특출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입시를 거쳐 명문 남성중에 입학했다. 하지만 1학년말 선수가 5명밖에 없어 대회에 못 나가게 된 배구부에 잠시 몸 담기로 한 게 영원한 배구인이 되는 계기였다. 3학년때 전국대회인 TBC배에서 공격상을 받고, 대신고 성균관대 보안사를 거치며 팀들이 모든 대회를 휩쓰는데 기여했지만 177㎝의 작은 키로는 청소년대표에 뽑혔던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일찌감치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그는 80년 선경코치 시절 180연승을 달리던 미도파를 잡은 후 그 해 말 선배들의 추천으로 침체된 모교팀을 맡았다.
그는 선수들의 24시간을 교수시간, 감독시간, 선수시간으로 3등분하고, 짧고 효율적인 훈련을 강조했다.
새벽 자율 체력훈련 이후 5,6교시까지는 수업에 충실토록 하고, 오후 3시부터 약 2시간 30분간 강도 높은 훈련을 한 후 나머지는 선수 개인시간.
훈련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지만 대신 부상이 많지 않고 선수들이 실업팀에 가서도 장수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는 85년 세계배구연맹 코치세미나에서 84, 88올림픽 미국팀 우승 감독인 더글라스 빌로부터 배운 '전원 공격서브' 및 '서브리시브 전담제'의 신봉자이다.
상대 공격의 예봉을 꺾기 위해 선수전원이 공격적 서브를 시도하고, 서브리시브는 안정된 2,3명이 전담해 정확하게 공격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는 86아시아, 87세계남자청소년선수권서 코치를 맡아 단신선수들로 연속 우승을 따낼 때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눈매만큼이나 선수를 보는 눈도 예리하다.
'야생마' 마낙길은 고교때 센터로 활약했으나 186㎝의 키로 센터를 해서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며 높은 점프력을 활용한 왼쪽 공격수로 전환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파워에서 당할 사람이 없으나 유연성이 떨어졌던 '임꺽정' 임도헌은 기계체조의 주연습인 매트운동(구르기)을 집중적으로 시켜 공수에 빈틈이 없는 국가대표 간판으로 키웠다.
'갈색 폭격기' 신진식은 콘택트렌즈 착용으로 인해 타격직전 볼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약점이 있어 70%의 힘으로 볼을 달래서 때리는 기술공격을 가르쳐 성공률을 높였다.
유석근 편집위원
김남성감독 주요제자 (전·현 국가대표)
홍기택(LG-전 LG코치) 김상보(LG-전 후지필름코치) 노진수(현대-성균관대 감독-현 LG감독) 김동천(현대-현 쿠웨이트대표감독) 남상선(현대-현 서문여고 감독) 마낙길(전 현대) 임도헌(현대-현 캐나다 UBC대 코치) 진창욱(전 현대) 박종찬(현대-현 성균관대감독) 윤상용(전 LG)김병선(전 현대) 김상우(삼성) 권순찬(삼성-현 울산제일고코치) 신진식(삼성) 장병철(삼성)
● 약력
-51세
-남성중(익산) 대신고 성균관대 졸
-보안사령부선수
-도로공사, 선경코치
-1981∼96년 성균관대 감독
-1998∼99년 현대 여자팀 감독
-2002∼현재 명지대 감독
-86 아시아남자청소년선수권 대표팀 코치(우승)
-87 세계남자청소년선수권 대표팀 코치(우승)
-89 아시아남자선수권 코치(우승)
-95유니버시아드 감독(우승)
-99세계여자청소년선수권 감독(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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