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의 당쟁은 숙종 때 와서 절정에 이른다. 남인과 서인의 격렬한 대립, 서인의 노론과 소론으로의 분리가 바로 숙종 때 일어났던 것이다. TV 드라마로 자주 만들어지는 '장희빈'이 재미있는 것은 복잡무비(複雜無比)한 정치적 변화를 배후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니 인물이 없을 수 없다. 그 중 남인 정권의 이론가였던 허목(許穆)의 연보를 읽어보면 무척이나 흥미롭다. 당쟁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의 관력(官歷)이 흥미롭다는 것이다.허목은 효종 원년 56세의 나이에 정릉참봉으로 처음 벼슬길에 들어선다. 과거를 통한 것은 아니고, 천거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출사(出仕)하지 않는다. 그에게 공조좌랑(62세) 공조정랑(63세)의 자리가 내려졌으나, 여전히 나가지 않았다. 정식으로 출사한 것은 65세 사헌부 장령부터였다. 65세라, 웬만한 사람은 은퇴할 나이다. 이율곡은 29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접어든 이래 출세를 거듭하여 이조, 형조, 병조의 판서를 거치고 우참찬까지 지낸 뒤 4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니, 허목은 율곡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65세에 비로소 출사한 허목의 관료로서의 삶이 순탄했던 것도 결코 아니다. 그는 현종 원년, 66세에 예송(禮訟)의 중심 인물이 된다. 격렬한 정쟁 와중에 그는 삼척부사로 밀려난다. 그리고 이어 68세에 벼슬을 접고 향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0년이 훨씬 지나 81세에 정계로 다시 복귀한다. 숙종 원년에 이조참판, 우참찬, 좌참찬으로 승진했고, 84세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삼공(三公)의 자리에 올랐으니, 조선시대 인신(人臣)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이후 그는 은퇴를 희망하지만, 숙종의 대우는 계속 높아져 궤장(机杖)을 하사하는가 하면, 집을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그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는 것은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된 1680년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다. 이때 그의 나이 86세였고, 2년 뒤 88세로 사망한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50세를 넘어 세 대학의 수시모집에 합격한 분이 있었다. 나이가 많다 해서 새롭게 공부를 하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허목의 일생을 보면, 일찍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사람도 있고, 늦게 성취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세상이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며 장년(壯年)들의 기를 죽인다. 하지만 허목에 비하면 청춘이 아닌가. 다시 시작해도 성취를 바랄 수 있다. 다만 허목처럼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함은 물론이다.
강 명 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