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보이는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이름이다. 홀쭉이로도 불리는 이 원폭을 실제로 떨어뜨린 B-29 전폭기가 최근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당시 기장이었던 폴 티베트대령 어머니의 이름을 따 에놀라 게이라는 애칭이 붙은 이 전폭기는 1960년에 해체되었는데, 20년간 복원작업을 한 끝에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의 중요 전시품목이 된 것이다. 박물관측은 이 비행기가 미일 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오는 12월부터 일반에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히로시마 원폭피해자연합 등 일본의 반핵단체들은 이를 원폭 정당화의 수단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이런 논란은 우리에게 단지 '강 건너 불'에 지나지 않을까?리틀보이는 히로시마에서 약 42만명에게 피해를 입혔고, 1945년말까지 약 16만명을 죽였다. 나가사키에서는 27만명의 피해자 중 약 7만 4,000명이 죽었다. 이들 중에는 엄청난 수의 한국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인 피폭자는 히로시마에 약 5만명, 나가사키에 약 2만명이었고, 그 중 피폭사망자가 각각 3만명과 1만명으로 추정된다.
원폭투하와 함께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8월 9일 "전쟁의 괴로움을 빨리 끝내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사용했다"고 연설했으며, 9월 6일 극동 미군총사령부는 "원폭 방사능 후유증은 있을 수가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즉각 "미국이 사용한 폭탄은 그 성능이 무차별적이고 잔학한 점에서 사용이 금지되고 있는 독가스와 다른 병기들을 뛰어 넘는다. 제국정부와 전인류 및 문명의 이름으로 미국정부를 규탄하는 동시에 즉시 그런 비인도적 병기의 사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엄중히 촉구한다"는 항의문을 미국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항복이후 '원폭투하는 국제법 위반'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이런 입장은 1955년의 이른바 원폭재판에서 재확인되었다.
일본인이 입은 원폭피해의 보상은 1952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정부의 책임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인 문제는 실종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리틀보이'에 의해 전 시가지가 파괴된 상황에서도 용케 잔해나마 살아 남았던 히로시마 산업장려관 건물의 운명이다. 이 건물은 1966년 히로시마 시의회에 의해 보존이 결정되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분명 이 원폭 돔과 평화공원은 '피해자 일본'의 이미지와 '인류평화를 위한 기원의 장소'로서의 이중적 이미지를 동시에 발산하고 있지만, 한국인에게는 전자의 메시지가 더 강하게 다가온다.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인양 과시하고 있구나'라는 감정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왜 한국인이 그렇게 많이 피해를 당했는지는 거의 강조되지 않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 원폭은 '인과응보', 또는 '해방의 촉진자' 이미지였지, 이를 반전평화를 생각하는 매개물로 받아들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인식은 명백히 바뀌는 듯 하다. 지난 광복절에 열린 반전 서울 페스티발의 전야제 연극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히로시마 메시지'라고 이름 붙은 이 연극은 1965년 일본으로 밀항한 피폭자 여성 최영주의 짧은 삶을 다루었다. 이 연극은 피폭자는 기형아를 낳는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지만, 한국인 여성 피폭자의 이야기가 미국인 신부와 일본인 변호사라는 중층적 관계 속에 설정되어 있어서 피폭자 문제뿐 아니라 원폭 자체의 문제를 국제적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자극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닌 피폭자들의 보상과 건강보호 문제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이번 에놀라 게이의 복원으로 시작된 새로운 국제적 상징정치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생각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다.
정 근 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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