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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세계철학자대회를 다녀와서/세계의 고민 깊이 파고든 "철학자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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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세계철학자대회를 다녀와서/세계의 고민 깊이 파고든 "철학자올림픽"

입력
2003.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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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제21차 세계철학자대회는 한국 철학계에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대회였다. 5년 후 열릴 제22차 대회를 서울로 유치해 국내 철학계 뿐만 아니라 지성계 전반에 하나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기 때문이다.대회를 후원하는 국제철학회연맹(FISP)은 1948년에 설립된 세계 최고의 철학자 기구이다. 세계철학자대회는 이보다 훨씬 앞서 1900년 파리에서 첫 모임을 가졌고 그 후 5년마다 주로 구미 각국을 돌며 열린 '철학자들의 올림픽'이다.

세계 각국에서 3,000명 안팎의 철학자들이 운집하는 대회는 형이상학 인식론 가치론 등 전통철학의 여러 영역을 광범위하게 다룬다. 하지만 대회 주제는 늘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둔다. 철학적 교육이나 정치 경제 문화를 주제로 삼았고 최근에는 환경이나 유전공학, 인공지능 등 과학 기술의 발전과 관련된 문제들을 많이 논의했다. 이 대회가 세계인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처럼 현대 사조의 핵심적 쟁점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번 이스탄불 대회의 주제는 '세계의 문제에 직면한 철학'이었다. 대회장인 터키의 쿠쿠라디 FISP 회장이 언급한대로 당면한 인류의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세제르 터키 대통령의 축사와 함께 열린 대회에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피터 싱어 등 저명한 철학자들이 대거 참석해 논쟁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도 차인석 서울대 명예교수가 '세계화의 내면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 철학계는 지난 10여년 동안 영국 미국 러시아 등에서 열린 이 대회에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한국철학회는 이 대회가 국내 철학계는 물론 지식사회 전반의 도약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실감하면서 대회 유치를 결심했다. 격변하는 세계 속에서 사상적으로 표류할 것이 아니라 시대적 담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상처 받은 조개가 진주를 품듯 수난과 질곡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 철학계도 사유의 실체를 잉태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회 유치 준비에는 FISP 부회장을 맡아온 김여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이 큰 힘이 됐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한국철학회 대표단의 관심은 당연히 5년 후 이 대회를 유치하는 것이었다. 회장인 나를 비롯해 전 회장인 정대현(이화여대) 교수와 실무를 담당한 김기현(서울대) 김형철(연세대) 교수 등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초청 연설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비판적 종합'의 유구한 철학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동서와 고금이 만나는 사상의 요충지라는 점, 완숙한 철학을 하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점 등을 역설했다.

결국 서양 철학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와의 접전 끝에 우리가 이겼다. 톨스토이는 "폭풍 치는 언덕으로 가라, 반드시 얻는 것이 있으리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한탄하지만 그것은 한반도가 바로 이 시대의 폭풍의 언덕이기 때문이다. 그 언덕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수난과 질곡의 땅이겠지만 사명감 있는 철학자들에게는 축복과 기회의 광장이기도 하다. 5년 후 수많은 찰학자들이 이 땅으로 몰려와 이 시대가 직면한 갖가지 문제와 씨름하게 될 것이다. 이 대회를 통해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시민, 성숙한 국민으로 거듭 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엄정식 한국철학회장·서강대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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