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나루 백사장을 굽어보는 강 언덕 솔숲에 자리잡은 호텔 워커 힐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 빼어난 경관과 넓은 터를 떠올릴 것이다. 좀 나이 든 사람들은 한국전쟁 초기 의정부 전선 시찰 길에 교통사고로 순직한 유엔군사령관 W 워커 장군 이름을 딴 것이라는 유래와 호텔 건설사업이 박정희 군사정권 4대의혹사건의 하나였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의혹의 실체가 무엇이었으며 무슨 필요가 있어서 어떻게 지어진 것인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다. 사업 착수가 너무 황당한 계기에서 비롯된 데다가 군 병력과 장비까지 동원한 건설사업이 극비에 부쳐졌기 때문이다.■ 엊그제 출판된 손정목씨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속의 워커 힐 건설 일화가 그 의혹의 일부를 풀어주고 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과 기획관리실장, 서울시립대 교수 등을 지낸 경력에 광복 후 50년 현대사 공부를 필생의 업으로 삼고 있다는 그의 연구에 따르면 워커 힐 건설계획은 즉흥적이었다. 1961년 7월 어느날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한국에는 적당한 미군 위락시설이 없어 연간 3만 여명의 미군이 일본으로 휴가를 간다"는 멜로이 유엔군사령관 말을 듣고 즉석에서 결심해 박정희의 재가를 받아 추진했다. 서울>
■ 며칠 후 박정희와 김종필이 아차산 기슭 옛 이승만 별장에서 휴식하다 경치에 반해 그곳에 시설을 만들기로 했다. 김종필은 정보부 제2국장이던 친구 석정선과 임병주 중령에게 워커 힐 건설사업의 책임을 맡겼다. 62년 1월5일 박정희가 참석한 성대한 기공식이 있었지만,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기공식 훨씬 전부터 기초공사에 해당하는 토목공사가 시작됐는데 여기에 각군 공병대 연 2만4,078명의 병력과 4,158대의 장비가 동원된 사실 역시 비밀이었다. 경비절감을 위해 죄수들까지 동원한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 건설자금 내역은 더 큰 비밀이었다. 2차 대전 직후 도쿄 맥아더사령부 문화정보과장 출신의 미국 언론인 D W 콘데는 그 자금이 부정한 돈이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정보부가 압수한 북한 간첩 공작금과 뇌물, 횡령한 예산, 밀수로 번 돈, 군에서 조성한 검은 돈 등으로 충당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사업은 63년 초 정권내부에서 문제가 되었고 64년에야 국민에게 알려져 4대의혹 사건으로 비화한다. 그러나 철저한 증거인멸로 진상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유서 쓰듯 책을 썼다는 저자에게 야만의 시대를 산 치욕을 조금 위안 받은 기분이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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