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 2학년이 되면서부터 우리 집에 놀러 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수는 여전히 나를 선생님으로 여기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그보다는 좀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집에 놀러 온 수를 캔버스 옆에 앉혀놓고 그림을 그리면서 "수는 나이가 들수록 예쁜 얼굴이야"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수의 표정을 살피면서 "우리 같이 신혼여행 갈까?"라고 물었다.그 순간 수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 나이 겨우 스물 셋으로 대학생활을 즐기고 돌아 다닐 때인데 정년이 가까운 교수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며칠간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싶어서 걱정이 됐다. 다행히 며칠 후 수는 학교에 다시 나왔고 내가 부를 때마다 화실로 찾아왔다.
수많은 학생 가운데 유독 수를 주목한 것은 그녀가 우리집에 놀러 올 때마다 내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선생님은 세계적인 위대한 작가예요"라고 그림을 칭찬했기 때문이다. 덕수궁 현대미술관 개인전 때 "저것도 그림이냐"고 비난 받았을 때와 비교하면 너무도 천양지차 아닌가. 나는 갑자기 새 천지가 열리듯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우리는 경주로 여행을 갔다. 나는 수가 함께 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꺼낸 말이었으나 수는 동의했다. 정말 나를 위해,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학교에서나 주변에서 혹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도 됐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수가 상처를 받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수의 의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수도 어느 정도 결심을 한 것 같았다.
3박4일의 여행은 정말 나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남들이 봤다면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우리는 행복했고, 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수도 표정이 밝아 안심이 됐다.
여행에서 돌아온 수는 어느 새 나의 조수 겸 비서가 됐다. 그리고 내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얼마 후 나는 미국에 갈 일이 있어서 내가 없는 동안 수에게 집을 쓰라고 했다. 수는 그 집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자취하던 방은 친구에게 맡기고 필요한 짐만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 자연스럽게 동거가 시작됐다. 특히 내가 수에게 마음이 끌린 것은 그녀는 한시라도 내 곁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고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시선은 언제나 내게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예상했던 대로 여기저기서 "제자의 장래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수에게도 "유명화가 덕에 출세하려고 그러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때부터 수는 학교강의 외에는 개인적 시간을 갖지 않았다. 24시간 내 옆에 붙어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는 내 옆에서 그림을 쳐다보거나 내 작업을 돕곤 했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이라고는 누드 모델뿐이었다. 집으로 오는 모델을 앞에 두고 같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나도 처음에는 수가 다른 여성들처럼 나의 유명세를 적당히 이용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여러 차례 마음을 떠보기도 하고 짜증을 부려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변함 없는 수의 순수한 사랑과 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를 배려해주고 내 예술을 생각하는 마음과 과거 결혼생활에서 맛볼 수 없었던 가정의 소중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옆에서 나를 돕는 수가 애처로워 내 일만 도울 게 아니라 직접 작업을 해보라고 권유도 했다. 하지만 수는 항상 내 일을 우선으로 여겼다. 생각해 보니 수의 그러한 행동은 나를 정서적으로 안정시키는 효과를 주었다. 이 때 대한적십자사에서 창립 80주년기념 벽화를 그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다행히도 그들은 적십자 정신인 평화를 표현하는 데 누드화가 제일 좋다고 하기에 나는 용기백배해서 '낙원의 봄'을 그려서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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