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들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전사태 와중에 꽃핀 시민들의 미담을 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약탈과 폭력으로 점철됐던 1977년의 뉴욕 정전사태와는 판이하게 시민들이 침착을 유지하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인간애와 시민정신을 발휘한 사례가 언론에 앞 다퉈 소개되고 있다.실제로 미국 동부의 8개 주에 걸쳐 30여 시간의 정전 중에 시민들이 보여준 위기대처와 사태수습의 노력은 인상적이었다. 뉴욕 타임스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도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침착해 구조작업이 수월했다"는 고층빌딩 경비원의 말을 전했다. 대중교통편이 멈춰 서자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자연스럽게 승용차에 동승했고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팀을 짜서 신호등이 꺼진 도로의 교통정리에 나섰다. 직장인들은 "이참에 걷기운동이나 실컷 하자"며 짜증내지 않고 기꺼이 걸어서 퇴근했다. 약탈 등의 범죄가 발생하긴 했지만 평상시보다 훨씬 적은 범죄 건수였다고 한다.
미국민들이 의연하게 정전사태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9·11테러의 학습효과 덕이다. 뉴욕시는 대테러작전인 '아틀라스 작전'을 신속하게 전개해 지하철과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재빨리 사태를 파악, 테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해 시민들의 동요를 막았다. 9·11을 직접 겪지 않은 캐나다는 상대적으로 대처가 늦었고 약탈도 많았다. 캐나다 토론토 시장은 사태가 발생한 지 수 시간 만에 나타나 "9개월 후에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최대의 베이비 붐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가 빈축을 샀다.
시민들의 대처가 돋보이긴 했지만 5,000만명이 폭염 속에 고통을 받고 항공기와 지하철이 멈춰서고 산업시설 조업이 중단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초래한 정전사태의 책임이 덮어질 수는 없다. 대선자금 모금행사를 겸해 미국 서부를 여행 중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문제는 노후한 송전망"이라면서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하나의 경종"이라고 일갈했으나 자신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정전사태는 21세기의 제국이라고 일컫는 세계 최강국 미국의 기초가 의외로 허약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독일의 dpa통신은 첨단 컴퓨터와 무기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미국이 일반시민의 삶의 질은 형편없는 분야가 많다고 꼬집었다. 불안한 거리 치안, 부실한 전화망과 수송체계, 국민을 빚쟁이로 만드는 금융제도, 낙후한 철도시설, 회사간 호환이 안 되는 휴대폰 등등. 정전이 일어난 지 사흘이 지나도록 정확한 경위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제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라크 전쟁에 500억 달러가 넘는 전비를 쏟아 부은 미국은 앞으로 이라크 치안유지 및 재건에 배 이상의 비용을 들여야 할 처지다. 연방정부 차원의 테러 방지 예산이 늘어나는 바람에 일반 국민들의 삶의 질은 그만큼 나빠지고 있다. 효율을 추구하는 민영화도 일반 국민들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미국은 세계를 향해서 큰 소리를 치기만 할 게 아니라 차분하게 내부로 눈을 돌려서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필수적인 기초를 다져야 할 때인 것 같다. 인체의 면역력이 증대되면 외부 바이러스에 강해지듯 국가의 기본이 튼튼해지면 테러에 대응하는 힘도 강력해질 것 아닌가.
이 계 성 국제부장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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