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해도 조감독이 필름과 NG 필름 여기 저기를 편집해 만들었습니다. '결혼 이야기'(1992)에 영화와는 다른 별도의 장면을 만들면서 본 궤도에 진입했다는 평을 듣습니다. 6∼7년 전에는 '접속'처럼 뮤직비디오 형식이 도입됐죠. 지금은티저(teaser), 메인, 뮤직비디오, TV스팟, 인터넷 버전 등으로 만들 뿐 아니라 아예 영화 속에 나오지 않는 별도의 장면으로 따로 저를 만들기도 합니다. 제가 누구냐구요? 저는 영화 흥행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예고편입니다. 영어로는 트레일러(trailer)라고 하죠.
예고편은 예비고사다.
개봉 첫 주에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요즘 풍토에서 예고편은 흥행의 풍향계다. "예고편은 관객에게 영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컨셉을 잡게 한다는 점에서 홍보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명필름 심보경 이사), "기사와 광고 등 문자로 인식된 영화를 시각적 화면으로 최종 확인해주는 마지막 절차"(싸이더스 노종윤 이사)라고 영화제작사는 입을 모아 예고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네티즌도 볼 영화를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챙겨보는 것으로 예고편을 꼽았다. 예매사이트 '맥스무비' 설문조사 결과 투표자 5,493명 가운데 무려 4,335명이 예고편(78.9%)을 들었다. '예고편이 관람동기를 유발한다'(Opzzang) '예고편으로 첫 맛을 느낀다'(sgchoi31) 등 네티즌의 반응도 비슷하다. 포스터(11.4%)나 홈페이지(7.5%)를 거론한 경우는 예고편에 비해 크게 낮았다.
'영화의 핵심을 1∼2분 안에 담아내야 하는 만큼 컨셉을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마케팅 일선에서 예고편을 만드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다. 이 때문에 예전처럼 조감독이 대충 편집해서 예고편을 만들 수 없다. 촬영과 편집을 하다 말고 감독이 직접 나설 수도 없다. 빠르면 개봉 6개월 전에 영화 컨셉을 만들어 예고편에 착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팩, 픽셀 등 컴퓨터그래픽 전문 제작 업체나 튜브픽처스 영상팀 등 전문업체, 최은석 등 유명 CF 감독에게 예고편을 맡기는 이유는 바로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고편, 변신은 무죄?
'컨셉'을 무리하게 잡아 과대포장으로 흐르거나, 거의 허위(?) 수준의 예고편이 제작돼 관객이 속아 넘어가는 일도 있다. '질투는 나의 힘' '지구를 지켜라' '동승' 등이 영화를 코미디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모두 장사가 되는 코미디 장르처럼 보이려고 애쓰다가 빚은 일이다. '질투는 나의 힘'은 나이 든 유부남과 젊은 대학원생이 여자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삼각관계를 '동전을 넣으시오' 등의 자막과 화살표 등을 넣어 게임처럼 익살스럽게 그렸다. 깊이 있는 작품성을 들킬까 우려해서였다.
최근 화제가 된 '싱글즈' 예고편도 비슷하다. "여성영화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포장했다"는 게 싱글즈 마케팅팀 정현정씨의 실토다. 정작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어깨춤 등을 넣어 '최대한 시원시원한 화면'을 만들려고 했던 것. 그래서 예고편도 CF제작사 가운데 삼성카드광고를 만든 알파빌44에 맡겼고 예고편을 위해 세트까지 따로 지었다.
거꾸로 섹스코미디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코믹한 요소를 덜어낸 예도 있다. '바람난 가족' 마케팅팀의 이윤정씨는 "상업영화도 예술영화도 아니어서 컨셉을 잡기가 너무 어려웠다. 대학생과 직장인들 대상으로 모니터링까지 했다"고 말했다. 컨셉이 훌륭한지 아닌지를 최종 판정하는 것은 관객이기 때문이다. 싸이더스 노종윤 이사는 "길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줘가며 모니터 화면을 보여주고 반응을 살피기도 한다"고 했다.
컨셉 잡기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관객의 보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요즘 영화사는 예고편을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든다. 영화 속 내용과 조금 다르게 만든 '티저형'과 영화 속 내용을 편집한 '본편'이 그것으로 '싱글즈' '바람난 가족' '조폭마누라2'(예고편 픽셀 제작) 등은 버전을 달리 해 제작했다.
인터넷, 극장용 등 모든 예고편을 만드는 데는 총 4,000만∼8,000만원의 제작비가 든다. 여기에 상영 1∼2개월 전 200∼400개 극장에 풀기 위한 예고편 프린트 값이 개당 3만원 정도가 들고, 예고편에 따로 들어가기도 하는 음악 저작권 계약에 3,000달러 가량의 저작권료가 추가된다. '싱글즈'는 영화 '언더그라운드', '바람난 가족'은 영화 '탱고 레슨'의 음악을 예고편에 별도로 삽입했다.
심의만 가혹한 게 아니다.
'바람난 가족'처럼 수위가 높은 경우에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는다. "나 만나는 남자 있다. 섹스도 해"라는 시어머니(윤소정)의 대사는 심의에서 여지 없이 잘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야한 장면도 간유리를 씌워 뿌옇게 처리하는 등 상당 부분 걸러내야 했다. 모든 극장예고편은 전체관람가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극장용 예고편이 미처 전하지 못한 부분은 인터넷 버전에 담는다. 인터넷에는 극장보다 더 많은 예고편 수요가 몰린다. 해외영화제 또는 해외시장을 겨냥해 해외판을 따로 제작해야 할 때도 있다.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바람난 가족'은 에로틱한 연상을 자극하는 국내판 대신 작품성에 비중을 둔 예고편을 따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예고편이 뛰어나도 예고편일 뿐이다. '100m 앞 미인'으로 드러날 경우는 관객의 냉혹한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1∼2분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1∼2개월을 바치는 헌신적 노력을 쏟아 붓는다고 못난이가 미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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