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8월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이 휘두르는 도끼에 맞아 죽었다. 살해된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는 동료 군인들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3초소 근처에서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치는 한국인 노무자들을 지휘·감독하던 중 변을 당했다. 주한 미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이 즉각 데프콘3(예비경계태세)를 발동하고 북한도 북풍1호(준전시 상태) 선포로 맞서면서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미군이 폴 버니언 작전(폴 버니언은 미국 전래 이야기에 나오는 벌목꾼)이라는 이름 아래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낸 8월21일에는 데프콘2(공격준비태세)가 발동되면서 미국 본토와 괌, 오키나와에서 수십대의 전투기·폭격기가 날아와 한반도 상공을 휘돌았고,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동해를 북상해 북한 해역으로 진입했다. 세계의 시선이 위기의 한반도로 쏠렸다. 북한이 폴 버니언 작전을 묵인하고 김일성 이름으로 미군 피살에 대해 유감을 표함으로써 한반도는 아슬아슬하게 전쟁을 에돌아 갔다.
폴 버니언 작전에는 카투사병으로 위장한 한국군 특전사 장병들도 참가했는데, 이들에게는 공동경비구역 내 북한군 초소들을 파괴하고 북한군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지시는 미군과의 협의 없이 한국 군부가 독자적으로 내린 것이다. 자신들의 초소가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도 인민군이 무대응으로 일관한 덕에 특전사의 의도적 도발이 교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만일 그 당시 북한군이 단 한발의 총알로라도 대응했다면 한반도는 전면전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국내 민주주의 세력의 저항과 국제 여론의 악화,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불화 등으로 정권 유지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박정희가 그것을 원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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