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애니깽 농장에 팔려간 조선 사람들이 고생고생하면서 망국의 설움을 겪는다는 얘기는 김영하답지 않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계약이 끝난 뒤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과테말라로 옮겨가 나라를 세웠다가 곧 멸망했다는 '데스페라도(desprado)'의 얘기라면 그에게 썩 잘 어울린다. 16일 만난 김영하(35)씨는 세번째 장편 '검은 꽃'(문학동네 발행)이 "그 때 최후에 남은 사람들 11명을 가리키는 '11 데스페라도'라는 말을 노트에 쓰면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2000년 한 재미동포에게서 들은, 지금은 잊혀졌고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과테말라 임시정부' 얘기였다.전직 군인, 내시, 도둑, 황족, 고아, 파계 신부 등 1,033명의 조선인이 멕시코 행 배에 올랐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이 사실상 '식물국가'가 된 해이다. 조국이 사라질 무렵 떠났던 이들은 1910년 계약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망국으로 돌아갈 땅이 없었다. 그리고 그 해에 멕시코혁명이 시작됐다. 황족의 자식이 천한 인부들과 기꺼이 섞이고, 도둑은 외국인 농장주의 앞잡이가 되며, 곱게 자란 처자는 몸을 파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민족수난사로 읽힐 법한 이야기에 대해 김영하씨는 "나는 억울함의 서사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국가가 정체성이었던 이들이 그것을 상실했을 때 존재의 의미는 어떻게 변질되는가. '검은 꽃'은 작가 스스로 던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진 소설이다. "한국인은 대개 국가가 언제나 있어 왔고 앞으로 계속될 초역사적 실체라는 믿음에 붙잡혀 있다. 나는 이런 믿음에 맞서 국가가 영속적인 무엇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또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고 김씨는 설명한다. 거대한 체제의 통제에서 벗어났을 때 문제는 인간의 운명으로 모아진다. 부딪히면서 "계급과 남녀노소를 초월해 한 선실에 모여있던 모습, 농장에서 해방돼 갈 곳을 모르고 떠도는 유랑의 삶, 부서지면서 살아 남는 인간의 생존 투쟁에 매혹을 느꼈다." 그러니까 '검은 꽃'은 반(反)국가주의 서사인 셈이다.
작품을 쓰기 위해 그는 올 초 3개월 여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답사했다.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농장을 찾아 다녔고 과테말라의 밀림으로 들어갔다. 팔려간 조상들이 과테말라 반정부군의 용병으로 참전했다가 나라를 세운 곳이다. 이민자들의 심정을 그대로 느끼고 싶어서 한동안 에어컨 없는 숙소에 머물다가 안티구아의 호텔에 자리잡고 글을 썼다. 스페인어를 듣고, 남미 음식을 먹으면서, 과테말라에서 차별 받는 마야인들과 만난 체험이 소설에 녹아들었다.
매우 도발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신세대 작가로, '새것'만 갖고 쓸 것 같은 이 작가는 두 번째 장편 '아랑은 왜'에 이어 또다시 역사소설을 냈다. 그는 "과거의 이야기에 매혹을 느낀다"고 말한다. "계급과 제도, 문명 등이 충돌하면서 욕망이 분출돼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만들어내는 게 과거의 '바깥'에 있는 사람인 나의 눈에 환하게 보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이야기의 야성이 거세된 공간이 아닌가." '손에서 꽃이 피는 마술 같은' 단편 쓰기를 통해 현대성에 대한 실험을 충분히 하고 있다면서 "장편은 역사가 잘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발랄한 '김영하식 글쓰기'에 익숙해지고 또 얼마쯤은 그런 작품을 기대할 독자들에게, 혹은 '김영하 역사소설'이 다른 수많은 역사물과 무엇이 다를까 묻는 독자들에게 작가는 '매트릭스'의 광고 문구를 패러디하며 유쾌하게, 그리고 자신있게 말한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것과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두툼한 한 권의 '대작'에 대한 오랜 꿈이 있다는 그는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또 다른 훈련으로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 프로그램(IWP)에 참가하기 위해 24일 출국한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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