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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상품의 역사

입력
2003.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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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자딘 지음·이선근 옮김 영림카디널 발행·2만8,000원"르네상스는 창조적 기운과 열정, 지적 흥분으로 가득찬 시대였다."

영국 학자 리사 자딘(런던대 교수)이 쓴 '상품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르네상스를 다룬 책은 많다. 대부분 그 시절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살펴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 부자들이 탐냈던 사치스런 물품들을 통해 그 시대의 문화적 정체성을 파악하는 독특한 접근법을 택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은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소비문화, 물질문화를 통해 그 시대를 새롭게 읽어낸다. 여기서 언급되는 상품은 유명 화가의 그림부터 호사스럽게 꾸민 인쇄본 성경, 정교하게 만든 지도와 보석을 박은 투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런던 내셔널갤러리 세인즈베리관에 소장된 미술품이 그의 주요 연구 대상이다. 그곳의 그림에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을 보여주는 훌륭한 상품들이 등장한다. 번쩍거리는 놋쟁반, 화려한 촛대, 마개가 있는 병, 경첩과 자물쇠가 달린 장롱, 정교한 타일이 깔린 바닥, 호사스런 책상과 긴 의자, 붉은 비단 걸개와 자수방석으로 꾸민 침대 등등.

이 책은 오늘날 우리가 소비주의라고 비난하는 물질적 충동이 르네상스의 견인차였음을 밝힌다. 권력과 부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이 고가의 미술 작품을 경쟁적으로 주문함으로써 많은 걸작이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 거래를 주선하는 상인들이 활개를 쳤다. 그 시대 화가들의 평판은 미학적 가치보다는 작품의 상업성으로 판가름 났다. 일례로 '빛의 화가'로 불리는 거장 티치아노의 그림 속에서 옷을 벗은 채 비스듬히 드러누운 우아한 여인들은, 음탕한 포즈의 누드화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려졌다.

상업이 발달하고 진취적 기상이 넘치고 탐험과 발견에 관심이 쏠리던 그 시절, 그들은 과시적 소비를 즐겼다. 아름답고 진귀한 사치품에 대한 관심은 들끓는 욕망의 또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서쪽의 기독교 세계에서 동쪽의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 시대 교역망이 미쳤던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며 치밀한 고증과 섬세한 필치로 르네상스의 물질문명을 조망한다.

이 책은 496쪽이나 되고 내용도 전문적이다. 그러나 읽기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천재 예술가들의 휘황찬란한 후광이나 교회의 영광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던 그 시대의 세속적 욕망을 재발견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화보도 넉넉히 들어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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