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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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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입력
2003.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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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진 지음 디새집 발행·8,800원"담뱃집 맴생이 양반, 눈끔쩍이, 고자리밥, 갑열이, 똑똑니, 오징개… 나는 이 사람들이 없으면 못살 것 같다."

전북 부안의 농사꾼 시인 박형진은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에 앞서 이런 헌사를 써놨다. 그는 첫딸이 스무살이 된 지금까지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는 토박이다. 초등학교만 나와 농사짓고 시 쓰면서 사는 그가 "동네 술집에서 막걸리 잔 나누면서 여러 술꾼, 형님, 친구들과 안주 삼아서 나눈 우스운 이야기들과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그곳 사투리를 섞어 들려준다.

부안은 바다에서 고기잡고, 들에서 농사 지으면서 사는 반농반어의 대표적인 고장. 최근에는 새만금 간척사업과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문제로 시끄러운 곳이다.

등장인물은 잘난 데 없는 보통 사람들. 오빠가 죽었을 때도 신랑이 죽었을 때도 미친 년처럼 웃어 젖히더니 비만 오면 무덤가에서 귀신처럼 울어대는 고막녀, 닭똥집 좋아하는 군수의 닭똥집을 혼자 먹어버려 좌천당한 면장님, 딸만 내리 넷을 낳고 다섯째를 낳자 고생했다고 손 잡아 주는 남편더러 "옘병 허지 말고 가서 아들인가나 좀 보고 오란 말이여" 라고 소리를 버럭 지른 부인, 대낮에 술 취해 홀랑 벗고 자다가 소나기가 오자 알몸으로 소 몰러 나갔다가 동네 여자들 기겁하게 만든 영감님…. 지은이는 이처럼 우습고 촌스럽지만 진국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쫀득쫀득하고 익살맞은 입담으로 우려낸다. 꾸밈 없이 더러 흉도 봐가면서 풀어낸 이야기 속에 그는 고갱이처럼 이런 말을 박아 놨다. "가스라진(약아서 얄미운) 놈보다 모자란 놈이 좋제."

동네에 소문난 술꾼 이야기며 아이 키우고 농사 짓는 이야기는 더욱 재미있다. 누구는 술 마신 뒤 조갈증에 냉장고 속 참기름 한 병을 물인 줄 알고 비웠다가 보름 내내 설사병으로 죽다 살았고, 누구는 요강 속 오줌을 들이마셨다는 등 웃지 못할 사건이 줄을 잇는다.

푸짐이, 꽃님이, 아루, 보리. 이름도 어여쁜 4남매를 둔 지은이가 농사꾼 아비로서 들려주는 예전의 농사와 먹거리 이야기는 자연을 아끼며 알뜰히 활용하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쪄먹고, 밥으로도 먹고, 술 담가 먹고, 엿으로 고아 먹기도 했던 고구마, 찹쌀고추장보다 더 맛있는 보리고추장에 밥 비벼먹던 이야기, 할머니 등긁개로 만들어 쓰던 옥수수 강치 등의 추억을 통해 가난해도 마음만은 넉넉하던 옛 농촌의 인정을 전한다.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잘 먹고 잘 산다는 요즘이지만, 지은이는 정말로 잘 산다는 게 뭔지 묻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굽어지고 꺾어지고 이렇게 휘돌아칠 때엔 차라리 옛날 그 모습으로 있겠다는, 딴엔 고집 아닌 고집으로 쓴 책"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회고조 넋두리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한 입이라도 벌어보려고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바다에 빠져죽고, 태풍에 나락이 잠기면 술로 인생을 망치는 등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의 팍팍한 살림을 안쓰럽게 드러내기도 하고,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빚만 늘어가는 현실에 한숨을 쉬기도 한다. 그렇게 빠듯하고 볼품 없는 삶 속에서도 낙천성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오늘을 사는 힘을 찾는다.

책에는 고향에 바치는 진한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그곳의 흙 냄새, 갯냄새, 사람 냄새가 후끈 끼친다. 이 책은 디새집이 펴내는 '찰지고 맛있는 사람들 이야기'의 첫 권이다. 향토색을 고스란히 간직한 지방에서 나고 자란 문인들이 자기 고장 사람들의 진솔한 삶을 사진과 함께 토종 언어로 보여주는 시리즈다. 디새집은 제 2, 제 3권으로 전남 장흥 시인 이대흠의 '수동떡집 사람들', 충남 보령 소설가 김종광의 '충청도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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