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근 지음 리수출판사 발행·1만2,000원중고 트럭을 몰고 나섰을 때 에어컨이 마침내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자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의 후끈한 훈김만 들어온다. 길거리 전광판은 화씨 100도(섭씨 37도)를 가리킨다. 차가운 물 한 바가지 끼얹고, 시원한 얼음물 한 사발 들이키고 싶은 유혹에 못 이겨 헐떡거리는 트럭을 집 앞에 세웠다. 자동차 기름때가 낀 작업복 차림으로 집안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이런 옷을 입고 일하느냐", "아빠모습 같지 않다"고 야단들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왜 에어컨을 안 켰느냐고 물으니 아내는 "고장 나서"라고 조그맣게 말한다.
하지만 잠시 후 에어컨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나오고, 아이들은 왜 아빠가 있을 때는 에어컨이 멀쩡하냐고 이상스러워 한다. "전기료가 얼마나 나온다고…"라는 말에 아내는 "누가 돈 때문에 그러나"며 붉어진 눈시울로 돌아선다.
많은 사람들은 삶에 지치고 아이들 교육 걱정으로 이민을 꿈꾼다. 언론이 소개하는 성공담은 그 꿈을 더욱 부추긴다. 한국을 떠나는 사유는 대개 '사회적 불합리와 치열한 경쟁' '열악한 교육환경과 자녀들의 교육문제' '낙후한 삶의 질' '직장의 불안정' 등이다. '기회의 땅' '축복 받은 나라'라는 미국은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까?
저자 임세근(49)씨는 국내 대기업에서 20년간 근무하다가 IMF 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미국에 이민 가 어렵게 뿌리내릴 때까지 쓴 5년 간을 이 '이민 일기장'에 담았다. 대기업 중견간부로서 고민 끝에 미국 이민을 결행한 그는 미국 동북부 펜실베이니아주 랭카스터에 정착한 후 그간의 여정을 셀프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소상히 보여준다.
식료품 가게 점원을 시작으로 양계 농장의 달걀 포장원, 자동차 정비센터 잡부, 복권 티켓 인쇄회사의 허드렛일, 인쇄회사의 막장 일을 거쳐 우체국 직원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중년 가장으로서 그가 생계유지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헤매며 겪은 애환은 눈물겹다.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임씨"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은 어린 딸을 달래고, 설날 새벽에 출근해 10시간 동안 일하고 받은 50달러로 세뱃돈을 주면서 느낀 처절함 등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고 회고한다. 오히려 일요일 아침 출근 무렵 걸려온 후배의 전화를 할인 상품 쇼핑 나가는 사람처럼 서둘러 끊고, 밤근무를 나갈 시간에 만나자는 연락에는 우아한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하는 것처럼 둘러대고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기발한 사업으로 떼돈을 벌고 자녀를 명문대에 진학시키거나 조국의 명예를 드높인 성공과 출세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움에 좌절해 짐을 싸들고 귀국할 명분을 찾아 기회를 엿보는 실패담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한 가정이 미국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시행착오와 어려움을 진솔하게 적었다. 저자는 미국 이민을 말리지도 권하지도 않는다. 다만 미국의 완벽한 교육환경, 윤택한 삶의 질, 안정된 직장을 얻기까지는 한국에서보다 두 배, 세 배의 노력과 고충이 따른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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