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 같은 사단이 벌어질 줄 알았다."지난 12일 대법원 회의실에서 열린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에서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과 강금실 법무장관이 회의장을 퇴장하고 자문위원직을 사퇴한 파동이 빚어진 다음날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중인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애당초 대법원이 7월에 새로 도입한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 제도는 근본적으로 허울뿐인 조직으로 한계가 분명한 터여서 이 같은 사태는 이미 예고돼 있었다는 것이다.
1971년, 88년, 93년에 이어 '제4차 사법파동'으로까지 치달을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이번 사태의 단초를 제공한 셈인 제청자문위원 2인의 퇴장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청자문위원회의 성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청자문위원회는 대법관 제청의 적정성, 공정성,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대법원이 이번에 신설한 조직으로 직전 대법원장, 선임대법관, 법원행정처장, 법무장관, 대한변협회장, 한국법학교수회장 등 6인의 당연직 자문위원으로 구성돼있다.
그러나 소장판사들과 시민단체들이 지적하듯이 자문위원회는 그 구성과 위상 등에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먼저 구성원을 살펴보면 자문위원중 절반은 전현직 대법관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기존 대법원 조직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다. 나머지는 행정부(법무장관), 재야법조계(대한변협회장), 법학계 등 직역 대표에 할당된 인사들이다.
이 가운데 강금실 장관은 현직 판사이던 93년 이번에 사표를 낸 박시환 부장판사와 함께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제출해 '제3차 사법파동'을 주도한 당사자다. 또한 박재승 대한변협회장도 최근 변협차원에서 별도의 후보를 추천하는 등 현행 대법관 임용절차에 이의를 제기한 인사다. 때문에 이들이 이날 전현직 대법관이 주도하는 회의 분위기에 한계를 절감했을 게 분명하다.
자문위원회의 또 다른 문제는 말 그대로 자문위원회가 단지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후보의 자질에 대해 '자문'만 할 따름이지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조직이라는 점이다. 강 장관은 자문위원을 사퇴하며 "사회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대법관 후보를 제청해야 한다는 본래 취지와 달리 대법원이 기존 관행대로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려는 마당에 더 이상의 참여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자문위원회는 단지 대법관 임용을 위한 모양갖추기용 조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법부는 그간 변화와 개혁의 물결속에서도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마지막 성역'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당연직 자문위원인 강금실 장관과 박재승 회장이 자문위원직을 사퇴한 게 온당한 지는 차치하고 자문위원회가 갖고 있는 구조적 한계가 제기된 만큼 이제 대법원은 슬기로운 해결책을 제시해야 할 차례다. 일각에서는 자문위원회가 최소한 2배수로 후보를 압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도록 하거나 대한변협과 시민단체 등에도 일정부분 추천권을 나눠주자는 견해도 내놓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대법원은 이번 사태를 국민의 사법부로 거듭날 수 있는 찬스로 삼아야 할 것이다. 소장판사들은 연판장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법원은 지금 '대법원을 못 믿겠다'는 종래의 불신을 불식시키고 개혁의 주체로 나설 것이냐, 아니면 여전히 개혁의 대상으로 남을 것인가를 선택할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윤 승 용 사회1부장syy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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