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수사결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과정을 거쳐 현대로부터 200억원을 전달받았다. 등장 인물들은 고수답게 대리인을 동원, 현금을 박스에 담아 과감히 공개된 장소에서 주고 받았고, 자금 집행도 제3자끼리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자금 전달 경위
4·13 총선을 앞둔 2000년 초 신라호텔에서 권씨와 김영완씨,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4자 회동을 했다. 권씨와 정 회장은 이미 1998년부터 김씨와 함께 7차례나 만난 사이로, 어색한 만남은 아니었다. 대화 중 권씨가 "좀 도와달라"고 하자 정 회장은 "알았다"고 답하는 등 구름잡기식 선문답이 오갔다. 검찰은 이 대목을 권씨가 총선자금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카지노사업 등 대북사업 과정에 현대가 어려움을 겪을 경우 도와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누가 먼저 청탁을 했는지 선후가 혼재돼 있다는게 검찰 시각이다. 이후 권씨가 먼저 일어서고, 김씨와 정 회장은 남아 구체적인 액수와 전달 방법을 합의했다.
200억원 노상전달
같은 해 3월 현대는 현대건설 등이 조성한 비자금을 3억∼4억원씩 서류박스 60여개에 나눠 담아 현대택배 직원들을 시켜 김씨가 지정한 장소로 한번에 15∼20개씩 4차례 날랐다. 상자는 1억∼2억이 들어가는 사과박스의 2배 크기 수준. 현금상자는 승용차와 밴 등 승합차로 옮겨졌다.
돈은 추적이 불가능해 돈세탁 조차 필요없는 1만원권 현금이 대부분. 장소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변 주차장, 갤러리아 백화점 뒷편 한양4차 아파트 주차장, 인근 청담중학교 이면도로 등 3곳이었다. 돈 전달과정에 가담한 한 인사는 검찰에서 "조수석과 차 뒤편 공간에 돈이 꽉 차 혹시 교통사고가 나서 돈이 터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김씨측 인사는 "박스를 다 싣고 나니 타이어가 약간 내려 앉을 정도였고, 그 안에 돈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그냥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고 전했다.
사용처 등 남는 의문점
김씨는 돈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신의 집으로 운반했다. 이어 권씨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권씨는 정 회장에게 감사의 전화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는 "권씨가 언제 어느 곳에 얼마를 전달하라고 하면 사람을 시켜 보냈다"고 미국에서 보낸 자술서에 쓴 것으로 알려져 이 돈은 권씨가 4·13 총선 당시 경합 및 전략 지역 후보 지원에 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대비자금은 2000년 3월은 물론 6월 남북정상회담 무렵에도 수차례 10∼40개의 박스 형태로 누군가에 건네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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