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보험산업이 크게 번창하고 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자동차보험, 암 보험 등 수많은 종류의 보험이 고객을 끌어 들이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이 중 몇 개의 보험에 들어 있는데 현대문명의 발달과 물질적 풍요를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보험산업의 호황은 현대사회도 인간의 안전과 행복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 아니 어쩌면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위험하고 불안한 요인이 많아져 그에 대비할 필요가 커졌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운에 대비함으로써 현재를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싶어하는 인간 욕망에 토대를 둔 보험의 급성장은 최첨단 사회에서도 운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훨씬 더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과거에 비해 보다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과거에는 불치병으로 취급된 많은 질병을 이제는 간단히 치료할 수 있고, 유아사망률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으며, 평균수명도 훨씬 더 길어졌다. 이런 현상만 보면 인간사에 미치는 운의 영향력은 크게 약해진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새로운 위험과 재앙이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도 사실이다. 교통사고와 산업재해는 가장 흔한 뉴스가 됐고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기상 이변 등이 알게 모르게 우리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나아가 현대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개인주의 문화는 실업, 노령, 빈곤, 이혼, 범죄 및 소외와 같은 사회문제를 양산, 개인과 사회에 위기와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위험은 인간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주로 자연의 섭리나 운이 부른 과거의 위험과는 그 성격이 다소 다르다. 하지만 이런 위험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닥칠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운의 문제로 이해되고 있다.
보험은 이처럼 불안요인이 다양해진 현대 사회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예기치 못한 불운에 대비하려는 인간 심리에 바탕한 보험제도의 역사는 정치사회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근대사회의 성립과 발전 자체를 보험논리로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정치사회의 일차적 기능은 내외의 약탈자로부터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그 대가로 국가가 사용할 재원을 충당할 의무를 진다. 따라서 국민이 납부하는 세금은 일종의 보험료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는 보험회사로 이해할 수 있다. 근대 사회가 팽창하고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면서 국가 기능과 의무도 크게 확장됐다.
특히 자연적·사회적 불운을 맞은 사회적 약자의 삶을 위협하는 몇 가지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가 직접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질병, 실업, 노령, 빈곤과 같은 문제는 그대로 방치할 경우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 안정까지도 심각하게 위협한다. 때문에 국가는 의료보험, 고용보험, 연금보험과 같은 다양한 사회보험을 도입해 시민적 충성을 끌어내고 사회적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다. 19세기말∼20세기 중반에 발전한 서구의 복지국가제도는 일종의 보험료인 세금을 올리는 조건으로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종합적으로 책임지는 종합보험회사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복지국가가 위기에 빠지고 자조(自助)와 자유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흥기하면서 국가가 관할하는 의무적 사회보험의 적합한 범위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불붙었다. 부유하고 유능한 상층계급을 대변하는 우익 이론가들은 의무적 사회보험의 범위를 축소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하층계급의 입장을 대변하는 좌익 지식인들은 공적인 사회보험의 범위를 최대한 확대할 것을 주장한다. 상층계급은 자신이 낸 비싼 세금과 보험료의 최대 수혜자는 빈곤층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빈곤층의 복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반면 하층민들은 개인의 안전과 복지를 사(私)보험 시장에 맡길 경우 지나치게 비싼 보험료 때문에 자신들은 혜택을 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현실적으로 사회보험, 또는 사회보장의 적절한 범위는 한 사회의 가치관(공동체주의적인가 개인주의적인가), 경제상황, 빈부의 사회구조 및 민주화 정도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우리사회의 사회보험의 내용과 범위는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고려해서 설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순전히 운에 의해 결정되는 '부당한 불평등'을 완화시키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면 사회보험과 세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부유하거나 유능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불행한 처지에 빠질 가능성이 낮고, 설령 불운을 당하더라도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자원과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회보험에 대한 의무가입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바꾸어 생각할 수는 없을까. 행운아들은 모든 조건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의무적인 사회보험료를 지불해도 그것이 그의 전체적 복지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보험에 가입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수도 있는 불운에 대비해두는 게 나쁠 것도 없으니 '안심료'를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또 다른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했다고 생각하면 뿌듯한 보람을 느낄 수 있어 스스로의 행복이 커지는 효과를 부를 수 있다.
가난하고 무능한 사람들에게는 보험제도가 훨씬 더 절박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사회보험이 없다면 헐벗고 굶주리거나 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 구제를 호소할 길이 없다.
부자들의 자선만을 기대하거나, 살기 위해 구걸이나 도둑질이라도 해야 할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부유한 사람들의 삶도 덩달아 불안해진다. 사회보험제도는 하층민들의 기초 생계를 유지해줌으로써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층민들의 안정된 삶은 각종 범죄와 사회불안을 방지하기 때문에 부유한 이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크게 도움이 된다.
보험제도는 다수가 모여 사는 사회에서 공동기금을 마련해 예기치 못한 불운을 당했을 때의 경제적 수요를 충족시키려는 집단적 '위험이전'이다. 특히 대부분의 선진사회가 그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는 사회보험 제도는 우리의 선택과 행위가 아니라 운의 작용에 따른 '부당한' 불평등을 완화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사회정의 실현의 가장 기초적 방법이다. 다양한 상황과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상부상조해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넘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장치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더욱 이상적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회보험료와 세금을 이런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탈세와 같은 불법행위와 사회보험료 산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피해 보다 안정되고 건강한 사회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김 비 환/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 연재를 마치며
그 동안 사회생활에 미치는 운의 영향력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핌으로써 운의 '부당한'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인간의 대응, 즉 사회정의의 당위성을 부각해 왔다.
사회정의와 개인의 행복은 별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빈부격차가 극심한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이나 상대적 빈곤에 시달려도 자신과 가족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면 불의가 판치는 가운데서도 개인은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삶은 서로 얽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정의가 실현된 사회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기본 조건이 된다.
부당한 운의 작용에 의한 개인의 불행을 최대한 덜어 주고, 누구에게나 행복한 삶을 모색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또한 개인의 삶과 행복은 그런 사회정의의 실현 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운과 사회' 연재가 그런 인식을 일깨우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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