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지금껏 통일에 관한 구체적 관념이 없어 평화 번영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면서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내가 답한다면 단연코 잘못된 일이라 하겠다. 분단이 확정된 뒤, 다시 말해 대한민국 건국 후 통일에 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 정부는 이 정부가 처음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정부는 대신 '동북아 평화 번영'을 중심 과제로 내세웠다. 이 구호는 두 가지 허점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민족 문제의 해결 자체를 목표로 보지 않고 다른 목표의 일부나 수단으로 본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한민족의 통일 없이는 동북아의 평화번영도 이룰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통일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줄어든 것은 역설적이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그는 남북 화해 협력을 추진하면서 예전부터 주창하던 3단계 통일론을 비롯한 모든 통일론을 잠재워버렸다. 중요한 까닭은 통일을 목표로 내세우는 것이 북한 당국의 불안 심리를 가중시킬 것이라는 점이었다. 전략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류협력의 확대가 민족 통일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큰 구상이 없었던 것은 햇볕정책의 큰 맹점이었다. 그러한 구상 없이 개인적 영웅심에 좌우된 결과 햇볕정책은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새도 없이 이리저리 찢기고 말았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평화통일을 얘기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또, 정파의 이익에 따라 평화통일의 구호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강경 반공주의자에게 그것은 흡수통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1972년 남북한 정부가 합의했던 민족 대단결의 원칙을 김영삼 정부가 파기하고 '민주'의 원칙으로 대체한 것은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을 공식화한 일이었다. 현정부는 아직도 그것을 우리 통일의 목표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는지, 언급이 없으니 알 도리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통일보다는 긴장완화나 평화공존을 더 선호한다. 손해만 볼 골치 아픈 통일은 그만두고 전쟁 없이 그냥 이대로 살자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이래 우리 정부의 생각이 이런 정도인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통일 없이는 한반도의 평화 번영이 보장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통일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그것이 과연 분단 비용보다 더 많을지는 의심스럽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민족 통일의 큰 그림을 구상하고 이것을 어떻게 남북화해협력과 연결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북아 평화번영의 구호는 속빈 강정일 뿐이다.
평화와 통일과 번영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정몽헌 회장의 비극적인 죽음을 밑거름 삼아 제도적 장치를 확립해야 한다. 화해협력 단계를 거치면서, 북한과 협상하여 국가연합 체제를 이룰 준비를 하고, 관련 강대국들과도 협의해야 한다. 이런 과정은 반드시 한 단계가 끝나고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겹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지금은 화해협력도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그렇다고 국가연합체 구상을 언제까지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2000년 6월 15일의 남북한 합의는 중요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이를 휴지조각처럼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가연합이든 '느슨한 연방제'든, 현실적으로 가능한 통일 방안은 그런 것 밖에 없다. 흡수, 수렴, 연합, 그 무엇을 통하든 단일 국가로의 변신은 그 뒤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그 다음 문제다. 평화 통일이나 동북아 평화번영 등의 듣기 좋은 구호는 남북한 연합 체제의 구성 없이는 이룰 수 없다. 이런 생각 자체를 혐오하는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은 사사건건 발목만 잡을 게 아니라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바란다.
김 영 명 한림대 사회과학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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