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쏟아진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무성한 녹음 속에선 매미 소리가 요란했고, 땡볕을 피해 그늘을 찾은 노인들은 한가로운 부채질로 세월을 쫓고 있었다. 신문을 펼쳐 든 할아버지, 음식을 차려 나와 담소하는 노부부…'민족 성지'라는 다소 엄숙한 수식어가 붙지만, 이 같은 푸근한 풍경이 있어 탑골공원은 친근한 도심 공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공원 안에서 조금만 주위를 살펴보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카세트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지나간 유행가는, 대낮부터 큰 대(大)자로 누운 아저씨들의 코고는 소리와 섞여 어느새 소음이 돼버렸다. 돗자리 대용으로 쓴 듯한 골판지와 신문지가 널려있고 가래침에 젖은 담배꽁초가 쌓여 엉덩이 붙일 자리조차 찾기 어렵다. 담장 옆 으슥한 곳은 더욱 가관이다. 술취한 노숙자들이 누가 보건 말건, 밤낮 가리지 않고 방뇨를 해대는 바람에 악취가 진동한다.
지난해 3월 서울시가 민족공원으로 단장해 재개장한 지 불과 15개월 만에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적 354호인 탑골공원은 조선 원각사 터에 1897년 영국인의 설계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공원이다. 국보2호인 원각사 10층 석탑이 있고 3·1독립선언문이 낭독됐던 역사의 공간이기도 하다. 1980년대 이후 노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그들에게 좋은 쉼터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부작용도 많았다. 문란한 놀이문화와 유적 훼손, 윤락 등이 성행한 것이다. 서울시가 순국선열참배공간 마련 등 공원 본래의 모습을 되찾겠다며 2001년 2월부터 1년 여 동안 기념광장을 조성하는 등 민족공원 성역화 사업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역화 사업에는 19억원이나 투입됐다.
시는 지난해 3월 탑골공원을 재개장하면서 장시간 체류나 무질서한 행위를 금지하는 등의 수칙을 세우고 입장 후 1시간 정도 관람한 뒤 퇴장토록 하는 운영방안도 마련했다. 광복회 회원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 20여명에게 공원 질서 유지 및 가이드 역할을 부여, 경건하고 정갈한 이미지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광복회 위탁관리 계약기간(1년)이 3월 완료된 뒤 종로구는 예산 등을 이유로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다며 자원봉사제를 중단하고 말았다. 지금 그 일은 공원관리소 직원 3명이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인력이 절대 부족해 질서 유지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 다시 몰려들기 시작한 노인과 노숙자들로 공원은 순식간에 옛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공원 인근의 한 상인은 "정문 앞에서 3, 4명이 고정적으로 노숙을 하는데다 일부 노숙자는 담을 넘어 공원을 들락거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서울시와 종로구의 생각은 안이하기만 하다. 서울시의 관계자는 "공원 관리의 모든 권한과 책임은 구에 있기 때문에 실상을 정확히 모른다"고 전제한 뒤 "설사 탑골공원에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그건 우리 사회 전체의 노인, 노숙자 문제와 관련된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종로구의 관계자는 "전체적으로는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으며 직원들이 수시로 현장에 나가 살펴보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공원에는 간혹 청소년과 젊은이, 외국인들이 찾지만 무질서한 모습을 보기 민망한 지 금방 나가버리기 일쑤다. 방학숙제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공원을 찾은 최미리(문래중 2년)양은 "만해 한용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왔는데 너무 지저분하고 술 취한 아저씨들이 많아 무서웠다"며 서둘러 공원 밖으로 나갔다.
공원에서 만난 30대의 한 남자는 "이곳에 오면 노인과 노숙자를 위한 사회 복지를 더욱 향상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공원을 무질서하게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후6시 공원 문닫을 시간이 되자 공원관리소 직원들이 나와 노인들을 내보내고, 잠자는 노숙자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밀려나가는 사람들 뒤에는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수북이 쌓여있었고 공중에는 바람에 날린 신문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박경우기자 gw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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