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베니스 영화제에 진출했던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은 외국 관객을 겨냥, '영화 속 개 도살 장면을 촬영하며 개를 학대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자막을 집어 넣었다. 애견 인구가 많은 유럽에서 자칫 안게 될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이런 식이라면 최근의 우리 영화에는 '이 영화 촬영을 위해 어린이를 학대한 바 없습니다'라는 면피성 자막을 반드시 넣어야 할 듯하다.
'바람난 가족'에서 이 콩가루 집안의 아이는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은 우편 배달부에 의해 납치된다. 신축 공사 중인 건물 5층 쯤에서 "아저씨 나 던지지 않을 거죠"라는 아이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아이는 던져진다. 아이를 던지기에 앞서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단이나 고민, 혹은 아이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표정 같은 것도 없었다. 아이는 마치 커다란 쓰레기 통에 던져지는 쓰레기 봉투처럼 떨어졌다. 툭.
'4인용 식탁'의 어린이 학대는 더욱 '풍부한 물량'을 자랑한다. 지하철에서 어머니에 의해 독살된 아이 2명, 정신착란을 일으킨 엄마가 자기 딸과 남의 딸까지 떨어 뜨려 죽인 2명, 오빠가 저지른 사고로 벽장에 갇혀 타죽은 1명, 후진하는 쓰레기 차에 치여 죽은 1명 등 모두 6명의 어린이가 죽어간다. 특히 돌을 갓 지나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쓰레기 차에 치여 죽을 때는 '빠지직'하는 두개골 깨지는 소리마저 효과음으로 나와 어지간히 둔한 사람이라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어린이는 점점 연령이 낮아져 왔다. '엑소시스트'나 '캐리'에서는 초경 무렵의 소녀가 공포의 근원이지만 '처키'에 이르면 인형의 탈을 쓴 악마가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로 변했다.
그 아이들을 더 이상 어리게 할 수 없게 되자 이제 그 아이들에 가하는 학대를 통해 공포를 확대 생산하려는 것일까. 파탄 난 가정의 희생물이자, 사회적 관계에 적응 못하는 어른의 희생물로서 아이들이 마구 '소비'되고 있다. 개에게 루이비통 옷을 입히고, 고양이에게 요가를 시키는 것이 유행이 되면서 아이는 이제 더 이상 사랑 받을 존재가 아니게 된 모양이다. '자식이 웬수'라는 말로도 이런 상황은 설명하기 어렵다.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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