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여름 휴가철이다 보니 여행 얘기에 자꾸 귀가 솔깃해진다. 그래서 이번엔 박열(朴烈·54)씨의 얘기다. 그는 홀로 세계의 오지만 찾아 다니는 사람이다. 매년 여러 달씩 인적 드문 비경에 흠뻑 빠져 지내길 벌써 스무 해 남짓이다. 이러면 자칫 수염 덥수룩한 '친(親)자연적' 풍모를 연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 아주 미끈하게 생긴 전형적 도시인이다. 중견 산업용가스 생산업체를 경영하는, 어찌 보면 보통의 생활인이다. 그러니 그의 오지 여행담은 부럽고 신기하기는 해도 우리가 엄두도 못 낼 기인(奇人)의 영역은 결코 아니다. 휴가철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떠나지는 못할 터이다. 버거운 일상에 휘감겨 일년에 한번도 선뜻 길 나서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번 여름 그렇게 차마 떠나지 못한 이들, 또 떠났어도 인파와 바가지, 더위에 맥 풀려 돌아온 이들 모두 그의 발길을 좇아 피안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혹 모를 일이다. 내년쯤, 혹은 그 몇 년 뒤라도 그가 먼저 가보았던 그 곳에 우리도 한번쯤 가게 될지를.
박열씨의 오지 여행은 특별히 재미있고 기이한 경험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하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므로. 그의 족적은 주로 중국 시안(西安)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천산남북로(天山南北路) 주변에 집중돼 있다. 티벳, 히말라야, 카라코람, 훈자, 고비사막, 타클라마칸사막 등…. 이 정도 지명은 이제 다들 익숙하다고? 하기야 더 이상 지구상에 이름만으로야 낯선 곳이 어딘들 있으랴. 그러나 해마다 수십만 관광객이 쓸고 지나가는 강원 정선과 양양, 인제 등지에도 인적 한번 닿지않은 골이 여전히 숱하다 하지않는가.
박씨가 고르는 여행지는 그런 곳이다. 그는 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오지특집 기사 등을 뒤져 대강 방향을 정한다. 현지에서 가이드를 고용하면 '당신만이 아는 곳, 가장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주문한다. 그리고는 몇 주일, 혹은 달을 넘겨가며 고행과도 같은 여정을 밟는다. 그게 그의 여행 방식이다. 할아버지의 구수한 옛날 이야기 같은 그의 모험담 중에 가장 인상적인 대목 몇 가지를 옮겨본다.
공포의 히말라야 거머리 '주가'
여름 몬순기에 창궐하는 히말라야 거머리는 네팔 등지를 여행하는 이들에게는 익히 알려져 있는 난적(難敵)이다. 박씨는 10여년 전 세계 최고의 오지라는 안나푸르나 산록의 '시크리스'로 가는 길에 이 거머리 떼의 습격을 받았다. 아침 출발 전 현지인 가이드로부터 주의는 들었다. 하지만 거머리라면 우리 농촌에도 흔한 것. 드러난 살에 스타킹을 네 겹씩 휘감으면서도 성가신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아득히 장엄한 만년설을 바라보며 숲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것도 검은 비가. 동물(사람도 동물이니까)의 피냄새를 맡은 거머리들이 나무 위에서 집단 낙하를 시작한 것이었다. 상상해 보라. 손가락만큼씩한 징그러운 유동체가 비 오듯 머리로, 몸으로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질겁을 하고 뜯어내려 했지만 길이가 30㎝나 늘어나도록 잡아다녀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뿐인가. 젖은 풀에서 올라온 거머리들도 발과 다리를 온통 덮었다. 거머리들은 등산화의 끈 구멍으로까지 파고들어 피를 빨아댔다. 반바지 차림의 현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도 털어내면서 춤 추듯 요란을 떠는 박씨를 재미있어 했다. 피를 먹어 퉁퉁하게 몸이 불은 거머리를 내려치면 터지면서 피가 낭자하게 튀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물파스를 갖다 대면 그냥 녹아버리더란다.
시크리스를 떠날 때까지 거머리는 끈질기게 괴롭혔다. 잠잘 때나 화장실에서도 사정없이 몸에 붙었다. 가축인 야크들은 온 몸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태연히 돌아다녔다. 나중에는 물파스 바르는 것도 귀찮아져 아예 몸을 내주었다. "그래, 너희도 먹고 살아라." 차츰 거머리들에 익숙해져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비로소 평안이 찾아왔다. 그 또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영혼은 새와 함께 하늘나라로
몇 년 뒤 라사 주변 티벳의 오지마을을 찾아다닐 때 목도한 광경이다. 아침 녘 만년설의 눈부신 빛으로 깨어나기 시작한 마을 길에 기묘한 행렬이 나타났다. 한 남자가 끄는 수레 위에 가마니 덮인 여자의 시신이 놓여있었고, 그 뒤를 아이 7∼8명이 따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남자 아내의 장례행렬이었다) 동네 개들도 뒤따라 대열에 합류했다.
행렬이 작은 집 앞에 이르자 남자가 문을 두드려 열고는 수레를 끌고 들어갔다. (우리로 치면 장례식장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개들은 모든 것을 아는 양 조용히 문 밖에 무리를 지어 기다리고 앉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남자가 양동이 두개를 들고 나왔다. 하나에는 칼로 발라진 살덩어리들이, 다른 하나에는 살점이 남은 뼈들이 담겨 있었다. 해체된 여자의 시신이었다. 개들은 던져 준 뼈들을 하나씩 물고 사라졌다.
장례 마무리는 마을 뒤 야산에서 이뤄졌다. 바위 위에 살덩이들을 흩어 놓은 뒤 집례자가 하늘을 향해 길게 호루라기를 불었다. 잠시 후 동쪽 하늘에서 10여 마리의 독수리 떼가 나타나 살더미를 향해 급강하했다. 이들이 말끔하게 살들을 먹어치우고서야 장례는 끝났다. 마을사람이 설명했다. "우리의 영혼은 원래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독수리를 통해 다시 하늘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지요. 당신은 운 좋게 이 풍습을 보게 된 최초의 외지인일 겁니다."
박씨는 훗날 아프가니스탄의 마을에서도 조장(鳥葬)을 한번 더 목격한 적이 있다. 거기선 내장을 들어낸 시신을 바위에 얹어 새들에게 먹이는 좀 다른 방식이었지만. 아아, 하늘로부터 그 귀한 생명을 받고도 제값을 못하는 우리들의 삶이여.
그는 이래서 그 곳에 간다
박씨의 얘기는 끝이 없다. 히말라야 수십m 바위 벼랑에 매달려 아슬아슬하게 채취하는 석청(그곳 신선초에만 날아드는 벌들의 것이어서 조금만 먹어도 2∼3일 혼절할 정도의 영약이란다), 산간마을을 대낮처럼 밝히던 수만 마리 반딧불이의 군무(群舞), 90살이 돼야 겨우 마을 노인정 출입이 허용되고 100살에 새장가 들어 아이를 보는 게 별일 아니라는 훈자의 장수마을….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마치 서유기 속 삼장법사의 여정을 따라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태초의 모습과 같은 오지의 풍광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티벳에선가 현지인이 저 멀리 보이는 기슭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릴 것 같냐고 묻더라고요. '한 세시간?'했더니 '일주일은 걸린다'며 웃더군요. 너무나 투명한 대기와 햇빛 때문에 원근감에 혼란이 온 것이지요. 특히 사막의 몽환적인 아름다움은 숨이 막힙니다. 하늘과 모래 바위 밖에 없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색깔, 밤이면 주먹만한 크기로 가득 쏟아져 내리는 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원래의 하늘빛…. 어느 화가도 결코 그런 색들을 재현해내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씨를 끌어다니는 건 그곳 사람들이다. "한번은 히말라야 산록의 호수에서 아침 세수를 하고 깜박 손수건을 놓아둔 채 길 떠난 적이 있었어요. 그 사실을 안 가이드 한명이 말 없이 사라지더니 밤이 돼서야 야영지에 나타났습니다. 종일 그 험한 산길을 되짚어 갔다 온 것이지요. 손수건을 받아드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집디다." 자연을 닮아 마냥 순수하고 착해 단 며칠을 함께 해도 헤어질 때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사는 것 이상의 행복이 없다고 믿는 이들. 박씨는 서울 일에 지쳐갈 때쯤이면 그들의 티없이 맑은 눈빛이 그리워 홀린 듯 또 배낭을 꾸리게 된다고 했다. 가진 게 많고 원하는 게 많아 오히려 삶이 남루한 건 우리들이다.
대개의 여행가들이 그렇듯 박열씨의 역마살 인생도 산에서 시작됐다. 고교 때 북한산, 도봉산 암벽을 두루 섭렵하고 대학 때는 전국의 오지를 다 누볐다. 그것도 혼자 텐트치고 비박하면서.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나무라기는 커녕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었다. 대신 "어딜 다녀오든 꼭 여행담을 들려줘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아버지가 3년 전 세상을 뜬 뒤에도 그 약속은 유효하다. 여행길에서 돌아오면 박씨는 어김없이 아버지 산소에 가 지나온 여정을 풀어 놓는다. 살아 생전과 똑같이. 그 세대가 그랬듯 일 외에 어디 다른 생활이라곤 없던 아버지에게 바람 같은 아들의 삶이란 얼마나 부러운 것이었으랴.
사실 지금 우리들 대부분 역시 아버지 세대가 짊어졌던 삶의 굴레에서 한치도 벗어나있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러니 한낱 뜬구름 같을지라도 딴 세상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는 것 또한 부질없는 일은 아닐 터이다. 수 없이 마음먹어도 끝내 한번 훌훌 털고 떠나보지 못하는 게 우리의 인생이므로.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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