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예술의 전당에서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덕혜옹주'를 제작했다. 그 때 내가 연출을 했고 이듬해 11월 마침 일본에서 열리는 베세토 연극제에 참가하게 되었다.공연 팀은 13살 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비극적 인생을 살았던 '덕혜옹주'의 국내공연을 기획할 단계부터 혹시 연극의 배경이 되는 일본에서 공연할 기회가 있을까 내심 바랐기 때문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런데 일본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받던 중 일이 벌어졌다. 공항 여직원이 공손하게 나를 좀 보자고 하기에 의심하지 않고 따라갔는데 긴 복도 끝에 있는 방에 그만 갇혀 버렸다. 물론 그 방에 다른 사람도 있긴 했지만 전화조차 쓸 수 없었고 그 어떤 설명도 없이 그냥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일본을 여행했었고, 공연을 앞두고 무대제작 일을 점검하기 위해 바로 일주일 전에도 일본을 방문했었기에 느닷없는 감금에 불쾌하고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더구나 내 행방을 알 길 없는 공연팀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알려줄 것을 그 직원에게 요구했으나 그것조차 묵살당했으니 그 분노며 참혹한 느낌은 오죽했겠는가?
연극 '덕혜옹주'에는 구한말 일본이 우리에게 잔악한 가해자로 나온다. 과거 일본의 잘못을 준열하게 꾸짖으며 죄를 묻는 '덕혜옹주' 이야기가 일본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방송국을 폭파하겠다고 전화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터라 시간이 갈수록 공연을 그르치게 될까 초조해졌다. 공항에서의 갑작스런 감금 역시 '덕혜옹주'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졌다.
두시간여가 지났을까. 엄중히 항의하는 나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던 공항직원은 뒤늦게 내 신분을 확인했다며 갑자기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착오가 있었다고 용서를 빌었다.
정말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고, 또 엄격하게 나라의 출입을 단속하는 것이 책임감 강한 공무원의 바른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후 요미우리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에서 각각 작가 정복근과 나를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공항사건의 악몽을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가해자의 열등감에 대해, 또한 화해와 용서에 대해 통역이 지치도록 장시간 메모를 했던 두 일본기자 모두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와는 전혀 다른, 지극히 형식적인 이야기만 썼기 때문이다.
그 일 이후 나는 가끔 '우리나라'라고 힘주어 말하고 싶어진다. 광복절이 곧 다가온다.
한 태 숙 극단 물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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