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매일 놀랄 일 투성이다. 쉬지 않고 깜짝 놀랄 일이 발생해서 어제 나를 놀라게 했던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기조차 벅찰 지경이다.생계문제로 아이 셋을 아파트 밑으로 떨어뜨리고 자신도 투신한 '엄마' 때문에 무슨 날벼락을 맞은 듯이 마음이 어지러웠다. 고교생이 성적이 나쁜걸 비관해 떨어져 죽는가 하면, 자식의 카드 빚 때문에 노부모가 자살을 하고, 학교 교장이 자살을 하고, 군대 안에서 벌어진 성폭행 때문에 군인이 자살을 하고, 가장이 자기 식솔들과 함께 자살을 하는가 하면,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아들을 따라 아버지가 자살을 하는 상황이 마치 연작소설처럼 펼쳐지고 있다.
어떤 작가가 소설을 그런 식으로 썼다면 우연의 남발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나 현실은 마치 자살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하다.
며칠 전에 여행에서 돌아온 분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무심코 여행은 즐거우셨어요? 물었더니 그분 얼굴이 어두워졌다. 늘 어딘가를 다녀오면 그 여행기간에 생긴 일을 즐겁게 얘기하시는 분이라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분 말씀이 여행은 좋았는데 함께 여행을 갔던 젊은 사람이 돌아와서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는 것이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잠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사진도 같이 찍었으며 함께 다닐 때에는 어두운 기색도 별로 못느끼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뉴스에서나 일상에서나 너무 자주 누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듣다보니 혹시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밥을 먹고 있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간 밤에 쓴 원고를 보내려고 인터넷에 접속했다가 '정몽헌 회장 자살'이라는 글씨를 읽었던 아침은 또 어떠했던가. 나는 내가 뭘 잘못 읽었나 했다. 그런데 모니터 창에는 분명히 그렇게 써 있었다. 나의 인터넷사용이라고 해보아야 이메일 보내는 것이 고작인데 너무 의아해서 커서를 맞추고 클릭을 해보았다. 바뀐 화면에 정몽헌 회장의 자살소식이 상세히 써 있었다. 누가 장난을 친 건가, 라고 여겼을 정도로 믿기지 않아 하고 있다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 사진까지 보게 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은 다음날까지도 가시질 않았다. 세상에 '이 사람까지'여서 였을 것이다. 그가 죽기로 결심할 때까지 상황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떤 색깔을 띠고 있던 간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구나 싶었던 것이다. 나처럼 느닷없이 그의 비보를 접하게 된 일반사람들 감정이 대개는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했다. 미구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번민스러운 일이라도 해결될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가 열심히 살고 있는 동안에도 죽음은 늘 가까이 있기 마련이다. 죽음은 우리 생에 끼어 드는 낯선 것이 아니라 삶과 함께 하는 동행자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을 때를 생각하는 일은 무분별한 욕망에 대한 견제와 타자에 대한 배려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에게 삶은 미련 없는 귀찮은 무엇에 불과할 뿐이거나, 불균형에 대한 저항이거나, 말못한 사연을 봉인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그 죽음은 개인에겐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상징적 행위가 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 그것은 결코 종결이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논란의 시작일 뿐이다.
죽음을 앞에 두고 번져나가는 저 수많은 말들. 그 말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 마치 또 다른 죽음을 재촉하는 듯이 끓어오르고 있다. 나는 고인에 대한 추모의 념(念)에 앞서 저 고삐 풀린 말들, 그리고 그 말들이 불러올 후폭풍이 두렵다.
신 경 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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