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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함께/김 호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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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함께/김 호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입력
2003.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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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무원록 왕여 지음·최치운 등 주석·김호 옮김 사계절 발행·3만2,000원"조선시대 살인·변사 사건 수사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은 글자 그대로 백성들에게 억울함이 없도록 한다는 깊은 정치 이념을 담은 책입니다."

세종 17년(1435년)부터 영·정조 때까지 300여년 동안 조선 팔도 각 고을에서 법의학 지침서로 널리 쓰인 신주무원록을 번역 출간한 김호(36)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은 이 책에 담긴 정신을 '애민(愛民)의 철학'으로 요약했다. 책은 살인 사건에서 검시(檢屍)의 방법과 검시 보고서 작성 요령까지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조선에서는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과학적 조사 방법과 엄밀한 심문 과정이 확립되지 않아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는 사람, 고문으로 숨지는 사람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세종은 원나라 법학자 왕여(王與)가 지은 '무원록'을 집현전 학사 최치운에게 풀어 쓰게 해 전국에 배포했다. "엄격한 사건 조사 및 투명한 법 집행에서부터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어진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주무원록 간행의 원동력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 법의학서로 규장각 귀중본으로 분류돼 있는 이 책의 가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의 정신을 읽어내는 것을 크게 뛰어 넘는다. 우선 안색이나 피부 빛깔을 살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검시가 당시 의학의 성과를 반영해 얼마나 과학적이었나를 십분 살필 수 있다. 특히 '격례(格例)'에서는 구체적 검시 절차, 보고서 양식, 상부 기관에 대한 보고 방식 등을 매우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어 그 치밀함에 놀랄 정도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실제 사건을 들어 검시 요령을 설명하는 여러 대목에서 당시 살인·변사 사건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나 말이 끄는 수레가 중요한 운송 수단이어서 교통 사고가 있었을까 싶지만 그 수레에 치여 죽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인 후 자살한 것처럼 시체의 목을 매 조작하는 '조액사(弔縊死)'가 가장 사인을 판별하기 어렵다는 대목도 있고, 중죄인을 심문할 때는 반드시 늙어서 병든 부모가 없는지 살펴서 처분해야 한다는 지침도 나옵니다."

이밖에도 관을 열어 진행하는 검시, 침구 시술 후 숨진 자를 조사하는 의료사고 검시도 나온다. 40여 가지에 이르는 사례에는 심지어 남자가 지나친 성교로 숨진 경우의 검시·판별법도 있다.

"옛 사람들, 특히 장삼이사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생활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확인해보고 싶다"는 김 연구원은 그래서 주로 조선 생활사와 의료사를 연구 주제로 삼아 왔다. 박사학위 논문도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재미난 것은 이 논문을 책으로 낸 2000년에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TV 사극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번에도 우연하게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사 사극 '다모(茶母)'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그는 "드라마의 검시 장면 중 잘못된 것이 많다"면서도 "신주무원록 같은 책을 일찌감치 번역하지 않은 역사학자의 책임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번 신주무원록보다 더 기대되는 것은 김 연구원의 번역으로 올해 말 출간될 예정인 '검안(檢案)'이라는 책이다. 역시 규장각에 소장된 이 책은 신주무원록에 이어 나온 조선 후기 법의학 지침서 '증수무원록 언해'에 입각해 각 고을 수령이 사건을 조사해 중앙 형조에 올려보낸 보고서를 모은 것이다.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국 방방곡곡의 살인 등 600가지 사건의 조사·처리 과정이 기록돼 있다. 2,000책이라는 방대한 보고서를 요약해서 번역·정리하고 '검안' 해제까지 붙였더니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3,500장이나 됐다.

그는 이 책이 " '조선민중실록'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당시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며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의 내용을 이미 데이터베이스로도 정리해 놓았다. 김 연구원은 앞으로 "임진왜란을 전후해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 시대까지 이용된 일본의 우리 신주무원록 활용 사례, 베트남에서 주를 달아 쓴 베트남판 신주무원록 등을 비교 연구해 보고 싶다"고 공부 욕심을 냈다.

/글·사진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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