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9월28일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의 탈레이사가르봉(6,904㎙). 90도에 가까운 빙벽인 최난관 코스 ‘블랙타워’를 무사히 통과, 마지막 정상 기슭만 남겨둔 한국의 세 젊은이가 돌연 사라져 버렸다.신상만(당시 32세), 최승철(28), 김형진(25). 당시 히말라야에서 날아온 이들의 비보에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이미 등정한데다 7,000~8,000㎙의 고봉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으레 있는 등반사고겠거니 하며 심드렁하게 지나쳤다.
하지만 그들이 도전했던 탈레이사가르 북벽은 ‘악마의 붉은 성벽’이라고 불리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코스. 그들에 앞서 국내 등정대가 6차례나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던 곳이었다. 세 젊은이의 죽음은 그래서 산악인들에게 더욱 깊은 한을 남겼다.
아무도 가지않은 길, 가면 길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패배한 것일까. 이 세 젊은이의 비극을 가리켜, 월간 마운틴의 남선우 대표는 “비로소 알피니즘의 정신이 무엇인지, 모험, 탐험, 등반의 본질이 무엇인지 대한 물음을 우리사회에 의미심장하게 던진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들과 함께 등반했던 사진작가 손재식씨는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탈레이사가르 정상등반이 아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뚫고 가려는 의지였다”고 말했다. 곧 알피니즘(빙설과 벼랑 끝에서 추구하는 산악인의 모험정신)이 추구하는 것은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 즉 굳이 남들이 가지 않는 험난한 길을 개척해 오르려는 의지라는 것이다.
올해는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 올해만 40여개 팀들이 도전에 나설 만큼 에베레스트 등정은 산악인들의 영원한 꿈이다. 코오롱 산악학교의 원종민 교무는 “높이 오르는 것에만 목적이 있다면 헬기타고 오르면 그 뿐”이라며 “같은 산을 오르더라도 어떻게 오르느냐가, 즉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그들이 우리에게 행동으로 제시했다”고 말했다.
나는 위험하다. 고로 존재한다.
‘과정에 대한 중시’는 산악인들을 더욱 더 인간의 한계상황으로 내몰게 한다. 1986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히말리야의 8,000㎙급 최고봉 14개를 모두 등정한 이후 ‘어떻게 오르는가’의 문제는 산악인들에게 더욱 절실한 과제로 다가왔다. 같은 산이라도 더 힘든 코스를 찾기 시작했고, 무산소 등정, 시간 단축 등의 더욱 힘겨운 등반을 추구하게 됐다. 네팔의 바부치리는 1999년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무산소로 21시간 30분을 체류하는 기록을 세웠고, 2000년에는 16시간만에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뤘다.
“나는 위험하다, 고로 존재한다”는 새로운 윤리령 아래 극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져버리는 이들의 도전, 그들은 그 속에서 무엇을 느끼는 것일까.
대한산악연맹 김병준 전무는 “한 척의 배에 의지하며 망망대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격랑과 싸울 때의 느낌, 그것이 바로 산을 오를 때의 마음가짐”이라며 “직접 체험하지 않은 한 그 경지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득도하지 않은 사람이 도의 경지를 알 수 없는 법. 그들의 언어는 마치 선사(禪師)의 언어를 닮아가고 있다.
왜 가냐고, 산에 내가 있기 때문에.
1928년 에베레스 등정에 나섰다가 실종됐던 영국인 말로리는 산에 오르는 이유에 대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월간마운틴의 남 대표는 그러나 “산에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고쳐 말했다.
산악인들의 도전은 종종 ‘험난한 자연에 맞선 인간의 도전’으로 오해되어 왔다. 남 대표는 “산악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정복이란 말이다”며 “자연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벌이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자연 아래서 자신을 극복해야 하고, 또 무엇에 순응해야 하는지 수시로 부딪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결국은 자신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관중도 심판도 없는 상황에서 벌이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 탈레이사가르 북벽에서 숨진 최승철씨가 당시 탈레이사가르 기슭 마을 강고트리에서 고행을 하며 깨달음을 찾는 수행자들을 보고 아내 김점숙씨에게 쓴 엽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산행도 하나의 수행이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