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야생 시베리아 호랑이의 생태를 안방극장에 선사했던 박수용(39·사진) EBS PD가 다시 돌아왔다.이번에도 그는 동토의 땅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달 반 만에 한번씩 나타나 만나기 힘들다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찍어 왔다. 2001년 2월부터 철저한 자기절제 없이는 불가능한 싸움을 마치고 5월 돌아와 편집실에서 한창 후반작업중인 그를 6일 만났다. 박 PD는 '물총새부부의 여름나기' '한국의 파충류' '솔부엉이' '시베리아, 잃어버린 한국의 야생동물 시리즈 7편'등 빼어난 작품으로 수상 경력이 화려한 자연 다큐 전문 PD이다.
한국 호랑이의 원류로 알려진 시베리아 호랑이는 길면 30년, 짧으면 10년 이내에 멸종할 위험에 처해 있다. 국경선이 그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장백산맥과 백두대간을 통해 한반도를 안방 드나들 듯 찾아왔던 바로 그 호랑이들이다.
"한반도, 만주, 연해주 등 동북아시아의 자연을 담는 것이 꿈이에요. 그 중에서도 영물로 알려진 시베리아 호랑이는 가장 촬영하기 어려운 대상이지요. 97년 촬영 때 250여 마리 였던 것이 이제 150여 마리로 줄었는데, 멸종되기 전에 반드시 기록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박수용 PD와 이효종 PD, 장진·순동기 AD 등 네 명의 EBS 자연다큐 제작진은 떠났다. 처음 6개월 동안은 호랑이의 발자국과 배설물을 확인해 호랑이의 생태지도를 그려 나갔다. 그 다음은 연해주 빼뜨로바섬 일대 100여㎞에 걸쳐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던 지역에 10여 개의 잠복지를 만들었다. 첫 촬영 때 20m 나무 위에서 호랑이의 생태를 찍었던 그는 이번에는 "호랑이와 같은 눈높이에서 그 모습을 찍기 위해서" 한 평도 안 되는 참호를 팠고, 그 안에서 한번 들어가면 석 달씩 계속되는 땅 속 잠복생활을 반복했다.
"호랑이는 아주 예민한 동물이에요.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있거나 낯선 냄새가 나면 도망가 다시는 촬영하기 힘들죠. 이 때문에 제작진 모두 언 주먹밥을 녹여 아침식사를 하고 생리현상도 참호 안에서 해결했어요. 오후 4시 이후에는 불도 켜지 못한 채 생활을 했습니다. 독방에 가둔 것에 소리까지 지르지 못하게 하면 딱 맞는다고 할까요."
호랑이 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했던 기나긴 잠복 생활을 어떻게 견뎠을까. 박 PD는 갇혀있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 관찰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자연 속에서 나무나 돌멩이처럼 가만히 숨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자연이 나를 향해 찾아오는 것을 느낍니다. 눈이 내리고 낙엽이 지고 안개가 찾아오고 스라소니가 찾아오고 수리부엉이가 찾아오면서 자연이 바뀌어요. 자연의 깊은 모습을 볼 수가 있지요. 이런 것들을 즐기고 기록하는 것이 바로 자연 다큐를 찍는 일입니다."
30분 분량 테이프 500개. 러시아의 전문 학자도 평생에 걸쳐 1시간 이상 보기 힘들다는 야생 호랑이의 모습을 300시간 넘게 육안으로 관찰했고, 테이프에 담아 왔다. "호랑이를 가둬두고 찍었다"는 오해만큼은 받고 싶지 않다는 박 PD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깎아지르는듯한 절벽 위에 서 있는 호랑이의 모습도 화면에 담았다. 계곡에서 내려오는 호랑이의 모습을 완벽하게 촬영한 장면을 본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부터 5만 달러에 필름을 팔라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
러시아 극우폭력단체로부터 이효종 PD, 장진 AD가 납치돼 집단 폭행을 당했던 일 등 박 PD는 열악한 예산 때문에 겪었던 수많은 무용담을 쏟아냈다. 죽을 고비도 넘겼다. "한번은 카메라를 발견한 호랑이 떼가 밤새도록 발톱으로 참호를 긁어대며 공격했어요. 그 바람에 살점까지 뜯겨 나갔지만 참호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다시는 호랑이를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 뒤로도 호랑이가 떠나지 않는 바람에 4일간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숨을 죽인 채 지내야 했지요."
'자연은 느낌의 전체성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다룬 책에서 발견했다는 이 귀절이 자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고 박 PD는 말했다. "인간의 감정이 들어간 다큐가 아닌, 호랑이들이 보여주었던 그 자연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려고 합니다."
"사냥꾼, 생물학자, 심지어 공비(共匪)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어도 PD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박수용 PD. 그가 연해주에서 힘겹게 담아온 시베리아 호랑이의 모습은 14일과 15일 오후 10시 방송하는 'EBS 특집 자연다큐멘터리―密林이야기' 1·2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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