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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안됩니다" 라고 말할 사람

입력
2003.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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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孟思誠)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청백리였다. 어느 날 그를 방문한 병조판서는 집이 너무 좁고 낡은 데 놀랐다. 마침 비가 와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옷을 적시고 돌아간 판서는 "재상의 집도 그런데 하물며 아랫사람이 이런 걸 가질 수 없다"면서 짓고있던 사랑채를 헐어버렸다.그 시절 관리들은 나라에서 받은 녹미(祿米)를 먹고 살았는데, 녹미란 게 오래 묵어 누렇게 변질된 쌀이었다. 하루는 밥상에 새하얀 쌀밥이 오른 것을 보고 맹 재상이 부인에게 물었다. "쌀이 너무 찌들어 도저히 먹을 수가 없기에 이웃집에서 좀 얻어왔다"는 대답에 그는 호통을 쳤다. 손님이 찾아오면 그는 의심을 사서는 안 된다고 반드시 문을 열어놓고 맞았으며, 공무를 논의할 때도 그랬다.

그래서 그는 세종임금이 관례를 깨고 선왕의 실록 사초(史草)를 보려고 할 때 단호하게 안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처신을 했기에 군왕의 부당한 일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조 때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은 너무 초라한 집에 살아 산지기에게 망신 당한 일화로 유명하다. 어린 소년을 산림법 위반자라고 붙잡은 산지기가 멍석에 앉아 짚방석을 짜고 있는 사람에게 소년을 잠시 맡겨놓았는데, 이원익이 딱한 사연을 듣고 풀어주었던 것이다. 산지기 눈에 정승이 시골 촌로로 보일 만큼 청렴했음을 말해주는 일화다. 권 근(權 近)·유 관(柳 寬)· 박팽년(朴彭年)·윤두수(尹斗壽)· 이언세(李彦世)· 남이웅(南以雄)· 김안국(金安國) 같은 이들의 염결(廉潔)과 강직함도 여러 문헌에 전하여 온다.

대통령을 모시던 한 공직자의 독직사건을 보면서 옛날 청백리들의 일화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가 출세에 눈이 어두운 평범한 공직자였다면 화제 삼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선비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학문의 길을 걷다가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보필해야 할 사람이 어떻게 그런 자리에 갈 수 있으며, 설혹 재가를 받았다 한들 그렇게 질펀하게 놀 수가 있단 말인가. 대통령 몫이라는 국화베개를 받아 들고 온 행위는 박사학위 소지자의 인품을 의심케 하고도 남는다.

소득 1만 달러 시대에 학자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선시대 선비들 같은 청빈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형사사건 연루 혐의를 받고 있는 유흥업소 주인이 제공하는 호화판 향응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겼다면, 그리고 값 비싼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올라와 집으로 가져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뇌물을 받고 청탁을 들어주었다는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국민을 실망시킨 것은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의 사건 처리다. 향응파동이 보도된 뒤 노무현 대통령은 부끄럽고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후속보도가 무서워 아랫사람 목을 자르고싶지는 않다"면서 자체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사표수리를 미루었다. 아랫사람의 분명한 잘못을 두고 언론과 힘 겨루기를 한 것은 대통령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양씨의 청주방문이 지역 인터넷 언론에 보도된 뒤의 형식적인 청와대 자체조사가 파동의 시초였다는 점에서 민정비서실의 부실조사 책임은 크다.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고 덮어둔 비서실장도 그렇다. 더 큰 문제는 청와대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양씨를 두둔했다는 사실이다. 4월에도 같은 업소에서 같은 사람들과 술판을 벌인 사실과 대통령 친구 둘이 참석한 것을 감추었고, 가혹하다, 억울하다 했다. 직장 동료로서 인정상 동정심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들이 얼마나 엄격한 도덕률을 요구 받고 있는지, 국민에게 어떤 기대를 품게 했는지 벌써 잊었는가.

앞으로는 좀 나아지리라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을 때 국민은 절망하고 만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윗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사람은 정녕 없는가.

문 창 재 논설위원실장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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