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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25> 5·16문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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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25> 5·16문예상 수상

입력
2003.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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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2년 소위 '5·16 혁명' 1주년을 맞아 신설된 제1회 5월 문예상 미술부문 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혁명정부 하에서 문교부와 예술원이 주최한 이 상은 1년간 문학, 미술, 음악, 연예 등 창작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을 낸 사람에게 주는 일종의 공로상으로 당시로서는 문화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이었다.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만큼 권위가 있었고 상금도 100만환에 이르렀다.이 상을 받게 되기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수상 후보자로 추천받은 것은 국전(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운영방식을 개선한 공로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는 국전에 대해 많은 문제점이 지적됐다.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전 개혁을 내세우고 나에게 개혁안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혁명정부는 내가 파리에서 막 귀국해서 지연, 학연 등 특정한 인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평소 생각했던 국전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응모 분야도 구상과 추상 외에 반추상을 추가했다. 혁명정부는 반추상 분야 추가를 결정했고 그 해 국전에서는 반추상 분야에 출품작이 몰려들었다. 국전 출품작의 절반이 반추상 응모작이었다.

나는 5월 문예상 본상 후보로 추천됐다. 이때 추천된 미술계 인사로는 이상범 임직순 김기창 박득순 박서보 윤명로 박영선씨 등 16명이었다. 심사는 김인승 김환기 김은호 배렴 김중업씨 등 7명이 맡았다. 심사위원들이 오래 논의한 결과 결국 후보자가 이상범씨와 나로 압축됐다. 다시 시작된 논의에서 7명의 심사위원 중 5명 이상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선정하기로 하고 투표를 했다. 그때 김은호 김인승씨는 나를 지지했고, 김환기씨 등은 이상범씨를 밀었다. 두 번의 투표 결과 나와 이씨가 번갈아가면서 4표, 3표씩을 얻었다. 결국 미술분과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이 사안은 심사위원 전체 회의로 넘겨졌다. 당시 이상범씨와 경쟁 관계였던 김은호씨는 전체 회의에 나가서 공개적으로 나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또 예술분과 심사위원 몇 명은 유럽여행을 하면서 파리에서 나를 만난 적이 있어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투표결과 타 분과 소속 심사위원들의 표가 나에게 몰렸다.

나는 이 상을 받아 상금으로 화집도 만들고 한동안 여유 있게 살았다. 그러나 귀국전 때 내놓은 작품이 팔리지 않고 또 대학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견제 세력이 많아 쉽지 않았다. 프랑스에 가기 전에 강사로 나갔던 서울대는 내 또래의 젊은 교수들이 모두가 반대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앞서 1959년에 내가 파리에 있을 때 서울대 미대의 장발 학장은 "서울대에 전임자리가 비었으니 하루 빨리 입국하라"고 연락했으나 내가 개인전 준비로 불가능하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공교롭게도 그때 교수가 된 그 인사가 나를 임용하는 데 대해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서울대의 몇몇 교수가 주도해서 열어준 귀국 환영회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환영회가 열리는 날 약속된 시간에 학교에 나가 보았더니 한 학생이 나를 발견하고 자기 작품을 들고 오더니 다른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그림을 가지고 몰려와 학교안이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그 인사는 "김흥수가 무슨 서울대 교수냐"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다. 그래서인지 그날 열린 환영회에는 원로교수 몇 분만 참석하고 내 또래의 젊은 교수들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1964년에야 수도여자사범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 후 4년제로 신설된 성신여대로 자리를 옮겼다. 성신여대에서는 신입생을 받아 2년 간 가르친 후 서울신문사 전시장에서 학생 작품 전시회를 열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신문에서도 전시회에 대한 격려의 글이 실리고 학부모들의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도 나에 대해 모함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심지어 도불 전 내가 2년 간 서울대 미대에 있을 때 가르친 제자까지도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때 마침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무어 아트 칼리지에서 초빙교수로 와 달라고 초청장을 보내왔다. 나는 학교도 시끄럽고 해서 그 해 6월28일 미국으로 떠났다. 나의 기나긴 미국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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