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나는 귀국하는 배에 올랐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서구의 새로운 화풍을 배우고 그곳에서 그림으로 독립해 보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을 떠난 지 6년 만이었다.10만여명의 화가들이 모인 파리에서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고국의 상황도 궁금하여 잠시 다녀올 생각으로 귀국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배가 요코하마(橫浜) 근처를 지날 때 누가 와서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배에서 내려 도쿄(東京)로 먼저 갔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려우니 들어가지 말라고 말렸다. 그렇지만 나는 비행기 편으로 입국했다. 공항에는 군인들이 늘어서서 사람들의 소지품을 마구잡이로 검사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것들이 불쾌하여 군인들의 질문에 고분고분 대답하지 않았더니 나를 반혁명 분자로 보았던지 내 가방을 송두리째 뒤집어서 조사하고는 내가 갖고 있는 달러를 다짜고짜 내놓으라고 했다. 그때 갖고 있는 돈도 별로 없고 숨겨온 것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 오랫동안 나를 붙들고 캐묻고 이것저것 뒤졌다. 이때 출구에서 나를 바라보던 어떤 사람이 한마디 던졌다.
"저 사람은 파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유학생입니다. 빨리 내보내 주시오. 내가 인터뷰를 해야 합니다."
그는 신문기자였다. 그제서야 군인들은 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 기자와 처음으로 귀국 인터뷰를 했다. 정황이 불안하고 어지러운 때에 기자가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렸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요코하마에서 내렸을 때 나와 동행한 한 일본 작가 주변에는 2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와 파리의 화단과 예술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에서 겨우 1년 체류했고 별다른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서울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귀국 전시회 준비에 들어갔다. 파리에서 가져온 그림 30여점과 새로 그린 작품을 통해 나의 새로운 화풍을 소개하고 싶었다.
나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주최로 10월8∼31일 세종호텔 자리에 있던, 수도여자사범대학이 운영하는 수도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당시 웬만한 전시는 전문화랑이 없었기 때문에 백화점 임시 화랑에서 열렸지만 나는 작품 분위기와 맞는 이 화랑을 택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화랑이 도심에서 벗어난 지역이라 관람객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며 말렸지만 이 곳을 고집했다.
6년 만에 여는 귀국전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나도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였다.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각 신문에서 파리 화단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원고 청탁이 밀려들었고 화단 개혁문제와 미술협회 내부의 갈등으로 미술계가 시끌시끌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시 준비에 매진했다.
그런데 전시가 열리고 마침내 내 작품이 공개됐을 때 화려한 색채의 내 작품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상반됐다. 대체로 젊은 작가들은 "에콜 드 파리(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모여든 화가 전체를 일컫는 말)의 색채 감각을 보여준다"며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선배 작가들은 "파리에 가기 전보다 나빠졌다"며 혹평했다.
그때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말하는 기성 작가들의 감각이야말로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사실 다양한 원색을 한 화면에 조화시킨다는 것은 고도의 감각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당시 기성 작가들은 갈색과 회색 톤을 위주로 한 표현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특히 광복 이후에는 "화려한 색채는 일본색"이라는 잘못된 편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색채에 대한 감각적 표현보다 사실적 묘사에만 의존하던 대(大) 선배들은 내 작품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혁명정부에서 은행금고를 잠그고 마음대로 돈을 인출하지 못하게 해 경제가 완전히 침체된 분위기에서는 작품이 팔리기 어려웠다. 세계 화단의 중심인 파리에서도 그림을 팔아 당시 돈으로 300만 프랑(약 720만원)이나 하는 집을 샀는데 고국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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