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고구려를 압도했을 만큼 대국이었습니다. 중국의 '수서(隋書)'에 따르면 동일한 시기를 기준으로 백제의 가구 수는 76만호이고 고구려는 69만 7,000호로 그 강역과 영향력은 대륙과 동아시아에까지 미쳤습니다. 이처럼 백제가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개방적인 자세로 각국의 인재를 등용하고 다양한 문화를 수용한 결과입니다."백제사 연구에만 20여년 매진해오면서도 한때 스스로를 주류가 아닌 '소수파'로 규정하고 있는 이도학(46·사진)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가 '살아있는 백제사'(휴머니스트 발행)를 냈다. 1997년 '새로 쓰는 백제사'를 출간한 후 6년 동안 발표한 논문을 보강하고 다듬어 하나의 통사(通史)로서 완결한 것이다. 그는 다양한 문헌자료와 금석문, 고고학 연구 성과를 활용해 기존의 통설을 과감하게 허물고 백제의 숨겨진 역사를 들춰내려고 한다. 백제는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의 후예라는 것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통째로 다시 쓰고 있다. 만주 백제의 존재와 왕실 교체, 동남아에 이르는 교역 범위, 익산 천도설 등 논란을 일으킨 부분뿐 아니라 그 동안 삶의 궤적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던 개로왕, 의자왕, 흑치상지에 대한 조명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
그가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대목은 백제 왕실의 기원을 부여로 보고 한강 유역의 백제와 함께 만주 백제가 존재했다가 4세기 중반 남하해 서울 지역의 백제 세력을 흡수 통합했다는 부분이다. 그는 1988년 학술대회에서 이러한 내용을 처음 발표한 후 학계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재반론을 준비하다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했다.
"또 하나의 백제가 만주 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자치통감, 진서, 송서 등 중국 사서와 외교 문서 곳곳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이를 일제시대 이후 사학계는 단지 고구려 혹은 부여의 잘못된 표기로 보고 있지만 서울 석촌동 고분군에서 만주 지역의 전형적인 적석총이 4세기께 등장한 것이나, 전시에 국왕이 선두에서 지휘하는 친정(親征) 방식과 대규모 약탈전 등은 바로 북방계통 문화의 흔적입니다."
그는 또 "성왕 대에 승려 겸익이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왔다는 것이나 서역의 낙타와 공작 등을 들여와 키웠다는 기록은 백제 문화의 국제적 성격과 무역 범위를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특히 성왕 때에 전국 5방(方) 중의 하나인 동방의 장관에 왜국의 마카무노 무라치(莫奇武連)를, 서하태수에 중국계인 풍야부(憑野夫)를 임명하는 등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극대화했다고 보았다.
그는 학계가 자신의 주장에 대해 비판만 하고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관성에 의해 지배되는 학계 풍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저서는 자신의 일관된 논리에 맞춰 구성했다는 점에서 전문학자들의 눈에는 통사로서 미진하고, 규명돼야 할 부분이 많은 주장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탐라국 등 주변국들과의 조공체계 성립이나 백제부흥운동에 관한 분석과 주장은 백제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동국대 사학과를 나와 한양대에서 '백제 집권국가 형성과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지금까지 8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9권의 저서를 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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