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아니다, 어 리틀(a little)!" 바나나를 썰던 지선(12)이가 마요네즈를 짜고 있는 친구에게 한마디 하다 말고 고개를 흔든다. 샐러드 만들기 수업을 하는 아이들은 영어 반, 웃음 반에 손짓까지 곁들여 입 안에 맴도는 영어를 뱉느라 진땀을 뺀다. 학년을 묻자 골똘히 생각하던 지선이가 "Five year"라고 대답하고, 곁에 섰던 교사가 "Fifth-year(5학년)"라고 고쳐줬다. 옆 교실에선 철사 골격에 검은 색 종이를 입혀 '태양계 배치도'를 만드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교사 토반 딕(24)씨와 학생들은 예쁘게 색칠한 행성 모형을 들고 "Mercury(수성)?" "Here(여기)" 식의 짧은 영어로 수업을 잇고 있었지만 표정들은 자못 진지했다.지난달 29일 경기 안산시 대부도 선감청소년수련원. 16일까지 3주간 열리는 경기도 주관 '영어캠프'에 모인 경기 안산 안양 군포 광명 시흥 지역 3∼6학년 초등학생 155명이 신기한 영어 체험에 흠뻑 빠져 있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영어캠프를 주관하기는 이번이 처음. 조기유학 이민 등 부작용을 해소하고 교육의 국제화를 위해 도가 추진 중인 '영어마을'의 전단계인 셈이다.
방학을 맞아 열리는 민간 영어캠프는 많지만 비용이 200만∼500만원 선이어서 허리가 휜다. 그렇다고 전국을 휩쓸고 있는 영어 열풍을 나 몰라라 하고 뒷짐만 지고 있다간 내 아이만 경쟁에서 낙오될 것 같다는 불안이 없지 않았을 터. 도의 영어캠프는 참가비 180만원 중 130만원을 도에서 지원하고 나머지만 부담하면 되는 게 가장 큰 매력이다.
참가자 20%는 저소득층 자녀로 참가비 전액을 지원했다. 관에서 벌이는 사업이라 다양한 영어 학습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고 아이들을 안전하게 맡길 수 있다는 믿음까지, 부모 입장에선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다. 이를 반영하듯 17일까지 안산과 용인 고양 포천 양평 등 5개 권역에서 열리는 '2003 신나는 경기도 여름 영어캠프'엔 초등학교 3학년생부터 중학교 3학년생까지 1,064명 모집에 1만1,493명이 신청해 11대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경기 영어문화원 황길원 정책보좌관은 "해마다 고액 민간 영어캠프에 아이들이 몰리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경쟁을 통해 값도 낮추고 질 높은 교육도 할 수 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어른들의 계산속이야 아랑곳없이 일단 캠프에 참석한 아이들은 색다른 영어 공부에 마냥 즐거운 모습이다. 숨막히는 학원에서 진도 나가기 수업이 아니라 이것 저것 만들어보고 놀고 생활하면서 영어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글로도 쓰지 않던 일기를 이곳에선 괴발개발 영어로 쓰고 있다. 손연진(32·안산 초당초) 교사가 일기를 꼼꼼히 손보자 얼굴이 빨개진 태림(12·광명 광일초5)이가 머리를 긁적인다. "학원은 사람이 많아서 헷갈리고 몰라도 그냥 넘어갔는데 여기선 잘 가르쳐주세요."
원어민과 함께 하는 갯벌 체험, 민속촌 탐험, 대전엑스포 과학 탐구 등 현장 학습 외에 '별들의 전쟁' '사랑의 집' '일류 요리사' 등 아이들의 흥미를 끄는 다양한 학습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이밖에 영어 이야기하기와 단막극 대회, 영어 신문 제작 등 한단계 높은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특히 안산 영어캠프는 원어민 담임교사 외에도 교육 현장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경기초등영어연구회 소속 교사들이 보조교사로 참여했다. 이들은 아이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캠프 기간 동안 영어만 쓸 수 있도록 돕는다.
오스트레일리아인 교사 제신타(여)씨는 "영어 발음과 문장 구성력은 매우 좋다"며 "처음이라 한국말을 쓰는 아이에게 제재를 하고 있진 않지만 차츰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도 "Yes, I can(할 수 있다)"이라고 답했다.
/안산=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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