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성(전남)의 차밭을 보러 가는 길. 아직 존재가 크게 알려지기 전이다. 막 해가 떠오른 이른 아침에 북쪽에서 접근했다. 보성읍내를 지나 율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재에 오르는 길(18번 국도)이다. 드문드문 다원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을 뿐 본격적인 차밭은 보이지 않는다. '듣던 것하고는 많이 다르네.' 은근히 실망이다. 봇재 정상을 지나니 내리막이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 같다. 언덕이 잘 내려다 보일 것 같은 길가에 차를 세웠다.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기이하고 섬뜩했다. 길쭉하고 거대한 파충류 수만 마리가 도열해서 산을 뒤덮고 있었다. 그 파충류들은 낮게 흐르는 아침안개 속에서 구불구불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눈을 감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다시 내려다 보았다.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느낌을 표현하는 데에는 다른 말이 필요없다. '아름답다.' 사람의 손과 땅이 일구어 놓은 것 중에 이렇게 완벽한 그림이 있을까. 한참 제자리에서 안개 속의 차밭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걷힌다. 멀리 호수 같은 득량만이 보이고, 이슬을 머금은 찻잎이 비늘처럼 반짝거린다. 아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맑고 투명한 연초록의 물결, 머리속과 가슴이 시원해진다.
보성에는 예로부터 야생차밭이 많았다. 물빠짐이 좋은 토양에 큰 일교차, 그리고 적당한 습기 등 차 생장의 적지이다. 1939년부터 인공으로 차를 재배했다. 1960년대에는 지금의 2배 가까운 산기슭이 차밭이었다. 한때 차 경기가 부진했던 탓에 많이 줄어든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보성차밭은 폭발적으로 알려졌다. 차문화가 대중화한 탓도 있지만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온갖 CF와 드라마, 영화가 이 곳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아름다움이 즐비한 남도에서도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소가 됐다.
차를 재배하던 농민들이 신이 났다. 해수탕에 녹차를 우려내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차를 주제로 한 음식은 물론 차를 먹인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개발하는 등 이름 그대로 보성(寶城)이 되어가고 있다. 나그네에게는 아름답고, 주민들에게는 보배로운 차밭이다.
/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