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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유서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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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유서 수수께끼

입력
2003.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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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WHO)는 자살을 '죽음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해쳐 죽음이라는 결과에 이르는 자멸행위'라고 정의했다(1968년). 세계보건기구다운 정의다. "자살은 살인의 치환(置換)이며, 자살충동은 타인에 대한 살해충동이 자기 내부로 향해진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분석도 부정적이다. 그러나 "자살은 진정한 철학적 행위(노발리스)" "현자들의 권리(카토)"라거나 "야만인들은 생각해내지 못하는 자살을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실천한다(볼테르)"는 말처럼 자살의 자유의지와 절대적 자기선택의 의미를 강조한 사람들도 많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유서를 통해 메시지를 남긴다. 1986년에 자살한 중3 여학생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항변은 영화 가요 동화의 제목으로 널리 알려질 만큼 파장이 컸다. 4월에 투신한 홍콩스타 장궈룽(張國榮)은 "마음이 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感情所困 無心戀愛世)"고 호소했다. 중국 무성영화시대의 신화적 여배우 완링위(阮玲玉)는 스캔들에 휘말려 음독자살하면서 "여론의 힘은 무서운 것(人言可畏)"이라는 말을 했었다. 1987년에 투신한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유서 중 '인간이 되시오'는 한때 유행어가 됐다.

■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미국의 여성아나운서는 1974년 생방송 중 자살장면을 보여주겠다며 머리에 권총을 쏘았다. 자살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냉철할 수 있을까. 1980년에 취재했던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아이는 아파트 5층의 벽면에 '나는 지금 막 떨어짐. 떨어져 죽음'이라고 썼다.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한 기자는 1957년에 자살하면서 칼럼을 통해 사망을 알렸다. "어제 나는 죽었다. 기자가 자신의 부고기사를 쓰는 것은 못 말리는 직업병일까?"라는 게 마지막 글이다.

■ 그러나 자살자들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한다. 공인일수록 그런 사정은 더한 것 같다.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유서를 봐도 자살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마지막 가는 길에 모든 것을 털어놓을 법도 한데,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으며 또 다른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고만 말했다. 아무 낌새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목숨을 끊었으니 더욱 그 심경을 이해하기 어렵고 진실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일부의 해석처럼 150억+α의 비밀을 안고 가려 한 것인가. 모든 유서에는 메시지와 함께 수수께끼가 담겨 있다.

/임철순 수석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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