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승현씨의 금융비리 수사 때 구속된 MCI코리아 회장 김재환씨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지 두달 가량 지났을 무렵인 2001년 3월 말. 김씨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그러자 로비 안쪽에서 기다리던 김은성 국정원 2차장이 다가와 "시끄러우니 방으로 가자"고 김씨의 팔을 끌었다. 김씨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따라가느냐"고 버텨 잠시 실랑이가 오갔다. 그러나 김 차장이 "믿어보라. 괜찮다"고 안심시키자 김씨는 마지못해 호텔 방으로 따라 올라갔다.이어 5분 가량 지났을까, 정성홍 국정원 기관과장이 방으로 뛰어들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 xxx 죽여버리겠다." "이 자식이 어디를 도망가." "허튼 소리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려." 정 과장이 욕설과 함께 김씨의 뺨과 어깨를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차는 등 5분 가량 폭행을 가했다. 김 차장은 이를 지켜보다 옆방으로 피했다. 김씨는 이때만 아니라 같은 해 2월 말 아미가 호텔에서, 그리고 3월 초에는 국정원 안가로 사용되던 교육문화회관 1010호에서도 이들에게 '험한 꼴'을 당했다.
김씨는 동갑인 김 차장보다 국정원에 5년 늦게 발을 들여놨으나 1982년 무렵 국내정보팀에서 함께 근무하며 친해져 결국 친구가 됐다. 국정원 관계자의 설명. "김씨는 89년 사직했으나 김 차장 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른 일을 제쳐놓고 도와줬다. 특히 김 차장이 형의 빚보증을 섰다가 부인이 자살을 기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병수발을 들어줬고 김 차장의 전세금도 내줄 정도였다." 김 차장은 이처럼 신세를 진 친구를 왜 폭행하고 협박했을까.
'김 차장이 부하직원을 동원, 김씨를 폭행했다'는 사실이 본보(2001년 11월13일자 31면)를 통해 밝혀지면서 '진승현 게이트' 재수사가 점화됐다. 결국 김 차장은 진씨에게서 5,000만원을, 정 과장은 1억4,6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다. 또 김 차장과 정 과장이 진씨의 금융비리가 문제됐던 1차 게이트 당시 진씨의 구명을 위해 국정원 안가에서 수시로 대책회의를 갖고 진씨를 격려하며 '특수사업'을 이유로 진씨의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김씨를 폭행한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김씨가 갖고 있는 진승현 리스트를 빼앗으려 한 것 아니냐'는 추론과 정 과장의 비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 정도였다. 또 김 차장은 세 차례의 폭행·협박 과정에서 보이스펜으로 녹음한 내용을 검찰에 제출했지만 지금까지 이 사실도 공개되지 않았다.
녹음 내용을 들어보자. "네가 나에게 건네준다고 승현이 돈 6억5,000만원 가져가고 그후 또 나에게 준다고 2억원 가져가고, 우리 직원에게 준다고 1억원 가져갔는데 승현이에게 돈 받은 사실이 있느냐. 왜 내 이름을 팔아 국정원에 돈 준다고 승현이에게 돈을 받았느냐."(김 차장) "그런 사실 전혀 없다."(김씨) "너, 우리에게 돈을 줬느냐. 정확히 하라."(김 차장) "너희들에게 한푼도 준 적이 없다. 그럼 됐냐."(김씨) "승현이한테 횡령한 돈 빨리 돌려줘라. 돌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오해 받는다."(김 차장)
녹취록은 김 차장과 정 과장이 김씨에게서 진씨 돈을 받지 않았고, 김씨에게 이름을 팔고 다니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인 것처럼 들린다. 김 차장은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이를 검찰에 제출했다. 하지만 재수사가 진행되자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지난해 4월 뒤늦게 구속된 김씨의 진술서 내용은 이와는 반대다. 김씨의 진술서에는 "2000년 9월 김 차장이 '빌린 돈이 있는데 급히 해결해달라'고 해 진씨에게 돈을 받아 김 차장과 그의 부인의 빚 8,500여만원을 대신 갚아주고 같은 해 11월 정 과장에게 5,000만원을 줬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김씨의 진술. "대화내용을 녹음할 때까지 정 과장 등으로부터 3번 폭력을 당한 후 상당히 겁을 먹은 상태인데, 김 차장이 정 과장 앞에서 '나에게 돈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해서 '돈을 준 적이 없다'고 얘기했다. 정 과장에게 준 돈에 대해서는 1차 수사 때 검찰에서 '정모씨에게 4,000만원을 빌려줬다'고 진술했는데 정 과장은 이를 자세히 몰랐는지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 결국 김 차장은 김씨의 입을 막고, 폭행·협박을 통해 유리한 진술을 녹취하려고 한 것이다. 자신의 금품수수 혐의 은폐가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김 차장이 녹취까지 해가며 결백을 입증해야 했던 이유는 뭘까. 당시 수사내용을 잘 아는 법조인 A씨의 설명. "1차 수사 당시 진술서에 기재되지는 않았지만 김 차장의 이름이 김씨 등의 입을 통해 나왔던 것 같다. 이 때문에 김 차장은 자신에게 돈을 준 것으로 얘기한 김씨에게서 '돈을 준 일이 없다'는 녹취록을 받아내려 했던 것으로 안다."
1차 수사 때 진씨 변호인 선임 문제에 개입했다 구속된 김삼영(전 검찰직원)씨의 당시 증언도 비슷하다. "검찰에서 진씨 사건과 관계된 사람 이름을 줄줄이 얘기했더니 검사 얼굴이 파래지고 갑자기 나를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해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얘기한 것을 죄다 기록에 남겨달라'고 했으나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영장을 청구했다. 진씨의 변호인인 김모 변호사와 수사팀의 L부장검사간에 금융비리만 조사하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그러한 내용을 담은 메모지를 내가 갖고 있었다." 당사자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결과만 놓고 보면 1차 수사는 이 증언이 딱 들어맞는다. 실제로 1차 수사 때의 김재환씨 진술서에는 '국정원 정성홍 과장'이 '후배 정모씨'로, '김방림 의원'이 '김모씨'로 기재돼 검찰이 정·관계 로비 부분을 은폐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재수사 과정에서도 김씨는 김 차장의 빚을 대위 변제한 8,500여만원과 정 과장이 추가로 받은 5,000만원에 대해 진씨 구명 청탁용임을 명백히 진술했지만 검찰은 두 사람을 기소하지 않았다. 수사팀은 "김씨의 진술이 일관성이 없고, 정씨에게 준 돈은 1차 수사때 김씨의 횡령액에 포함해 이미 기소한 상태여서 법리적으로 추가기소가 어렵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김씨는 몇 차례 반복되는 진술에서 일관되게 김 차장에게 돈을 준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특수부 출신의 한 중견 검사의 해석. "횡령으로 기소한 뒤 나중에 뇌물이었던 게 드러났다고 해서 처벌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횡령과 뇌물은 별개 범죄이고, 뇌물로 받은 사실이 실재한 이상 뒤늦게 드러난다 해도 뇌물죄는 성립한다."
/이진동기자 jaydlee@hk.co.kr
■돈받은 명목 "특수사업"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과 정성홍 전 국정원 과장이 진승현씨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해 내세운 명분인 '특수사업'은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은 재판과정에서 끝까지 구체적 내용을 함구, 특수사업의 실체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단서라곤 정 전 과장이 "공개 예산으로 집행하기 힘들고 보안이 요구되는 사업이며, 국가에 공헌하려는 기업인들이 참여하고 있다"며 "나는 창구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검찰 진술 내용이 전부다.
당시엔 진씨로부터 돈을 받은 시기가 2000년 4·13 총선 전후라는 점을 들어 특수사업이 총선자금 지원이라는 추정이 제기됐다. 그러나 실제는 '사적인 목적'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특수사업과 4·13 총선을 연결짓는 이유는 정 전 과장이 진씨와 함께 총선 직전인 4월8일 전남 목포에 내려가 김홍일 의원에게 1억원을 건네려다 거부당했고, 몇몇 출마자에게 진씨 돈이 흘러간 정황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정 전 과장이 특수사업에 쓸 2억원을 진씨에게서 건네받아 고위인사에게 전달했다는 시점은 4월18일과 19일로, 총선 직후였다. 금액도 총선지원용으로 보기엔 턱없이 적은 액수다.
김 전 차장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법조계 인사 K씨의 증언 "나중에 김 차장에게 개인적으로 물어 알게 됐지만 특수사업이 뭔지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총선과는 관련 없는, 사적인 일이었다. 남자가 젊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적인 일이나 국정원 업무와 관련 없는 개인 용도로 사용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정 전 과장 등에 대한 감찰 조사를 벌였던 L씨도 "국가적인 일이라면 국정원 예산이 있는데 진씨 돈을 왜 쓰느냐"면서 "자기들이 돈을 쓰고 그런 것이지"라며 비슷한 취지로 설명했다.
검찰 내에서는 "정 전 과장 등이 진씨를 끌어들여 일부 출마자에게 돈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특수사업은 김 차장 등 두 사람의 개인비리를 감추려는 구실일 수 있다"는 해석이 유력한 편이다. 실제 검찰은 정 전 과장이 특수사업용으로 받은 2억원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범죄혐의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찌 됐든 소기의 목적을 거둔 셈이다.
/이진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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