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내 생활이 안정되면서 나는 비로소 여유를 갖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댄스홀에 가본 적도 없었고 놀러 다니지도 않았다. 바캉스 시즌에도 화실에서 그림만 그렸다.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데다 한국 사람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였지만 화단에서 인정 받기 전까지는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다가 개인전 이후 몽파르나스에 한 번 가본 후 자주 들렀다. 몽파르나스는 화가들이 모여 토론도 하고 사교도 하는 곳이다. 여기에는 많은 카페들이 있었는데 다른 지역의 카페와는 좀 성격이 달랐다. 겉으로 볼 때는 사람들이 만나고 대화하는 평범한 장소지만 실제로는 파리 문화의 중심 무대였다. 화가들뿐만 아니라 시인 소설가 연극인 등 당대의 문화인으로 자부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저녁 7시만 되면 카페 세렉트라는 곳을 찾았다. 여기서는 어디서 왔는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그룹을 형성하고 어울려 새벽까지 예술에 관한 이야기나 세상 돌아가는 잡담을 나누었다. 또 주말에는 한 친구의 집으로 몰려가서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 모임에서 남자와 여자는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 따로 모이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이러한 생활이 얼마나 자유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됐다. 중매결혼이 없는 서구에서 여성들은 결혼 적령기가 되면 이런 카페에 드나든다. 과거 한국 여성처럼 얌전하게 집에만 들어박혀 있다가는 시집도 못 가고 늙는다. 따라서 적령기에 접어든 여성들이 카페에 혼자 앉아 있으면 십중팔구 애인을 만나러 왔든가, 애인을 구하러 나왔다고 보면 된다. 내가 즐겨 가던 카페 세렉트에서도 자유를 찾아온 사람들로 붐볐다. 부부가 함께 와서 놀다가 돌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독신으로 그때그때 쌍쌍을 이루어 어울렸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아미 드 몽파르나스'(몽파르나스의 친구들)라고 불렀다.
이들은 최대한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처음 만난 사람끼리 열렬한 사랑을 나누다가 다음 날에는 서로 다른 파트너와 앉아있는 것도 봤다. 이들은 결혼을 하려고 하지도 않고, 결혼했다고 구속받지도 않았다. 몽파르나스에 오는 여행객들 중에는 부부가 따로 와서 놀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부부라도 상대방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첫눈에 반한 상대가 있으면 남편이나 부인,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옆에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말을 건네고 '랑데부'를 청했다. 그렇다고 그런 문제로 서로 언쟁이나 주먹다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또 누구든 '과거'에는 관심도 없고 따지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중요했다.
몽파르나스의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상대에 대한 호기심과 육체적 욕망을 앞세웠다. 사랑 없는 성 관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도 반드시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 조건이었다.
처음 이런 모습은 무척 생소하고 충격적이었다. 우리의 관념과 도덕으로 보아 그런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다. 하지만 점차 그런 문화에 익숙해졌다. '정조'나 '정숙'이라는 말이 결국은 남성들의 이기주의에서 비롯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홀아비 3년에 이가 서 말이고, 과부 3년에 금붙이가 서 말'이라는 우리 속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사회에서도 혼자 된 여성이 반드시 정절을 지키며 산 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몇 달 동안 몽파르나스에서 겪은 일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는 계기였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는 사이 나도 모르게 그들과 같은 생활 속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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