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신 자살로 만 54년의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정주영 고(故)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9남매 중 5남으로 정 명예회장 사후 그룹 경영을 총괄한 후계자였다.서울 보성고를 나온 정 회장은 연세대 국문학과를 수석 졸업하는 등 어려서부터 총명해 선친인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각별한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1975년 현대중공업 차장으로 입사해 사회 생활을 시작한 정 회장은 평소 말수가 적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일 처리가 치밀하고 깔끔한데다 상황 판단력이 뛰어나 정 명예회장의 대를 이을 후계자 1순위자로 그룹 내에서 꼽혀왔다. 정 명예회장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몽헌이와 몽준이(현대중공업 회장)는 공부도 잘하고 (경영)능력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주위 사람들은 전한다.
정 회장은 천성적으로 나서길 싫어하고 소탈한 성품의 소유자로 어린 시절부터 '촌색시', '촌닭'으로 불렸다. 그러면서도 업무에 있어서는 선친인 정 명예회장처럼 집요하면서도 뚝심을 발휘하는 강한 추진력을 발휘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전한다.
정 회장은 80년 당시 삼성이 독점하고 있던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어 단시간에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를 궤도에 끌어 올리면서 사업 수완을 인정 받기 시작했다. 이후 정 회장은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정보기술의 경영을 잇달아 맡는 등 정 명예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정 회장이 형을 밀어내고 그룹 후계자가 된 것은 1992년 대선이 결정적이었다. 정 회장은 대선 패배 후 대선 비자금 조성 혐의로 선친을 대신해 옥고를 치렀다. 정 명예회장은 항상 이 점을 안타까워 하며 정 회장을 차기 그룹 후계자로의 낙점 했다. 이런 선친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 회장은 2000년 3월 '왕자의 난' 때 둘째 형인 몽구(夢九) 현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제치고 사실상의 그룹 모기업인 현대건설 경영을 장악하면서 현대그룹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
특히 정 회장은 선친의 평생 유업인 대북사업을 진두 지휘하며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에 기여했지만 무리한 대북사업 투자에 발목이 잡혀 결국 현대건설, 현대전자등 주력 계열사를 채권단에 넘겨주는 등 현대그룹이 공중 분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정 회장은 '수익성 없는 대북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친의 뜻을 이어가야 하다는 일념으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 그룹 사활을 걸고 추진한 대북사업이 불법 대북송금 사건에 휘말려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정 회장은 도덕성에 치명 상을 입었다. 여기에 계열사 자금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최근 들어선 150억 비자금 사건까지 터지자 정 회장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든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보고 있다. 정 회장은 자살 직전까지 현대상선(4.9%)과 현대종합상사(1.2%)의 지분만 직접 소유하고 있었고,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택배 등에 대해서는 계열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정 회장 명의의 재산은 현대상선 주식 500만주 약150억원과 성북동의 시가 20억원 상당의 주택 등 200억원 정도다.
유족으로는 현대상선 현영원 회장의 딸인 처 현정은(48)씨 사이에 딸 지이(25·대학원생)와 영이(18)양, 아들 영선(17·이상 고교생)군이 있다.
/송영웅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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